정녕 레노보는 싱크패드가 될 수 없는가?

2005년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IBM의 PC 사업부를 인수한 레노보의 등장은 PC 업계의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16비트 개인용 컴퓨터의 발원지이자 세계 PC 시장의 큰 거목이던 IBM PC 사업 인수는 단순히 업체의 사업부 인수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변방의 시장으로만 평가 받았던 중국을 PC 시장의 한복판으로 끌어낸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중국 안에서 PC 판매율 1위를 자랑하던 레노보가 사업 인수 직후 세계 3위의 PC 업체로 도약한 것 역시 관련 업계의 시선을 모으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그 레노보가 한국에도 있다. 2005년 5월부터 한국 지사가 가동을 시작해 PC와 노트북을 팔고 있다. 고래를 삼켰다던 새우의 새끼들이 세계 3위라는 타이틀을 등에 지고 2년 동안 우리나라 PC 시장을 헤엄쳐 다닌 것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나면서 PC 시장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IBM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건 레노보가 아니라 삼성과 LG 같은 강력한 토종 브랜드와 HP나 델 같은 수입 PC 브랜드다. 그렇다면 레노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난 해 3분기와 4분기 레노보는 우리나라 노트북 판매율에서 8위에 올랐다. 순위표를 거꾸로 들고 봐야 톱 3안에 들까? 순위를 세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이제 레노보는 우리나라 안에서 고만고만한 중국 노트북 업체로 전락해가고 있다. 인수 전 상위 톱 3 안에 있던 LG-IBM 때와 같은 제품, 똑같은 브랜드를 쓰지만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같은 성적표가 나왔다는 건 납득이 안된다.


레노보가 IBM으로부터 인수해 쓰고 있는 싱크패드는 얼마 전에 나온 비즈니스 리서치의 조사결과 다른 브랜드보다 앞선 선호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런 브랜드를 가졌음에도 어째서 레노보는 우리나라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일까? 싱크패드와 차별된 레노보 브랜드 전략 때문은 아닐까? 싱크 패드를 고급 브랜드로 남겨두고, 좀더 넓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런칭했던 레노보 브랜드가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레노보가 IBM PC 사업을 인수했을 당시 그저그런 중국 기업이라는 인식보다는 PC 업계의 새로운 강자 탄생이라는 놀라움과 함께 그 후속 행보에 대한 기대도 컸다. 특히 제품은 좋으나 비쌌던 싱크패드 노트북의 가격을 조정하고 요즘 트렌드에 맞춘 제품 형태를 다양하게 늘려 좀더 대중화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레노보가 IBM을 인수한 가장 큰 배경에 싱크패드라는 확고부동한 브랜드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싱크패드의 확대를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바람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노보는 이런 예상을 깨고 싱크패드의 가격 조정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 고정관념을 깨는 깨는 신제품도 내지 않았다. 대신 싱크패드를 프리미엄 브랜드로 둔 채 자체 브랜드인 레노보를 런칭했다.


레노보 브랜드를 런칭한 것은 저가 시장의 확대가 아니라 싱크패드가 갖고 있지 않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좀더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그 성능을 인정받은 싱크패드지만, 사무용이나 학습용 시장으로 치우친 브랜드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자체 브랜드를 냈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레노보 브랜드 런칭은 이해할만했다. 하지만 레노보의 중대 실수는 레노보 노트북이 싱크패드만큼의 완성도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싱크패드가 레노보로 넘어간 만큼 대다수는 레노보 브랜드의 노트북을 싱크패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다. 단단하고 야무진 디자인에 빈틈 없이 속이 꽉찬 그런 노트북을 기대했다. 싱크패드의 장점인 보안과 데이터 보호는 빼더라도 첫 인상만큼은 닮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뷰를 해본 몇몇 레노보 노트북은 싱크패드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디자인과 민숭맹숭한 컬러 조합, 어설픈 구성으로 까다로운 한국 이용자에게 차이나 디스카운트를 저절로 떠올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와이드 화면을 가진 다른 노트북과 비교해서도 질적으로 앞서는 게 없는, 싱크패드 명성을 기대하면서 기다렸던 우리나라의 구매 대기자들에게 레노보 노트북은 싱크패드와 연관성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재앙과도 같은 노트북이었다.


분명 싱크패드와 레노보 브랜드를 동일 관점에서 두고 제품을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 이를 알면서도 싱크패드와 비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여전히 싱크패드를 레노보의 대표 브랜드로 알기 때문이다. 이미 강력한 카리스마로 노트북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싱크패드의 모자란 자리를 메우기 위해 레노보 브랜드를 런칭했으나 우리나라 이용자들의 기준은 싱크패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을 상대로 싱크패드 상표를 뗀 것은 그 프리미엄에 기대지 않고 팔겠다는 브랜드 전략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와 비슷한 형태의 노트북과 경쟁해야 하는 신참의 처지에 서있어야 할 레노보는 싱크패드를 만드는 회사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레노보는 싱크패드를 만드는 회사라는 인지도 프리미엄을 레노보 브랜드와 노트북을 알리는 데 쓰려고 했으나, 이것이 싱크패드와 직접 비교가 되면서 레노보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레노보가 자체 브랜드를 키우려는 의지는 확고했지만, 싱크패드를 따르지 못하는 완성도는 오히려 중국 업체가 갖는 제품의 한계처럼 비치게 만든다. 검정 무반사 우레탄 케이스에 단단하게 맞물려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싱크패드의 이미지는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지만 레노보는 인상을 남길만한 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디자인, 성능, 구성, AS, 가격 등 높아질대로 높아진 우리나라 이용자의 눈높이에는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레노보에게는 싱크패드 만큼의 완성도를 지니면서 값은 싸고 즐거운 노트북이 필요하지만, 지금 수준의 노력과 자세 그리고 제품으로는 차이나 디스카운트가 떠오르는 브랜드의 이미지만 더 강하게 남길 것 같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One Comment

  1. 2007년 3월 12일
    Reply

    chitsol 회원님의 포스트가 미디어몹 헤드라인에 링크되었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