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소모품은 연료가 아니다’는 인식을 어떻게 깰것인가?

어제 오전에 KTX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부산으로 내려온 이유는 HP가 부산에서 프린터 관련 기자 간담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요일까지 NDA가 걸려 있어 어떤 내용인지는 공개하지 못한다. 대신 HP에게 하고 싶은 말 하나를 남길까 한다.


사실 다른 이들이 HP 프린터의 토너와 잉크 같은 소모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 따지면 ‘다 떨어지면 채우는 보충재’로써의 인식일 것이다. 프린터를 살 때 어디까지나 하드웨어 자체에 들어 있는 기술을 사는 것이고 이것이 중요하지 그 안에 들어 있는 토너나 잉크 기술을 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HP의 인식은 좀 다른 것 같다. 아니다. 많이 다르다. HP는 프린터라는 하드웨어보다는 토너나 잉크 자체를 기술로 인식한다. 하드웨어보다는 소모품 자체가 더 중요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가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소모품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꽤 거리가 있는 시각 차다. 이러한 시각 차는 HP 프린터의 가격과 나중에 추가 주문하는 컬러 토너의 가격이 거의 같은 데에서 생긴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는 과정에서 확인했다.
 
HP 컬러 레이저젯 2700을 예로 들어보겠다. 프린터 일반 판매가는 65만 원인데, 이 프린터용 컬러 토너 세트(CMYK)의 가격은 62만원이다. 컬러 레이저젯 2700에 들어가는 토너와 추가로 구매하는 토너는 같은 양이므로 결과적으로 프린터와 컬러 토너의 가격 차이는 겨우 3만원 밖에 나지 않는다.


자, 여기서 소비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보자. 프린터와 토너의 가격 차이가 겨우 3만원 밖에 나지 않는다면 결코 토너가 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토너에 비해 프린터를 싸게 판다고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샀던 프린터 가격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토너를 단순한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소비자들은 그보다 싸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65만원의 프린터에 62만원의 토너가 비싸다고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HP는 이러한 소비자들의 인식 문제에 대해서 수긍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프린터 자체보다는 토너 카트리지 자체가 기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모품 비용이 비싸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프린터라는 하드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 좋은 토너를 만들어내는 화학적 설계와 견고하게 작동하는 카트리지 기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카트리지 형태로 나오는 HP 토너는 자동차에 주입하는 연료가 아니라 엔진 그 자체라는 주장을 폈다. 달리 말해 교체해서 쓰는 토너 카트리지는 단순히 프린터라는 차체에 토너라는 연료를 보충해서 달리는 게 아니라 엔진 그 자체를 바꾼다는 이야기다. 아시아퍼시픽 전산용품 부사장과 마케팅 디렉터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한 것을 보면 적어도 HP 내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할지 의견 통일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HP 내부에서 의견 통일이 어떻게 이뤄졌든 간에 중요한 것은 소비자다. 내가 주장했던 것은 65만 원을 주고 샀던 프린터의 토너가 모두 떨어져 교체를 해야 할 때 토너를 교체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프린터를 사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점이다. 62만 원을 들여 새로운 토너를 끼우느니 새 프린터를 사면 오히려 AS 기간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3만 원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것이라는 점에서 토너 카트리지만 바꾸는 것보다 이득일 수 있다는 것이다. HP는 엔진의 교체를 주장했지만 나는 그 값으로 아예 차 자체를 새 것으로 갈아탈 것을 말한 것이다. 아무리 새 것 같은 중고차라도 이미 AS 기간은 지났을 뿐만 아니라 엔진을 교체해도 중고는 중고다. 그럴 바에는 새차로 가는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HP는 프린터 값을 높여 소모품과의 가격 격차를 벌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으나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새 프린터 가격을 낮춰서 소비자들의 구매 장벽을 낮춘 것은 내가 아니라 HP 스스로 한 것이고, 가격을 높여서 소모품에 대한 가격 인식을 바꾸는 것 역시 그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장과 소비자가 내릴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방법으로 몰아가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HP 토너는 연료가 아니다’라는 그 단순한 명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 역시 뾰족한 해법을 내놓기가 어렵다. 하지만 새차를 사기보다 엔진만 바꾸라는 의미의 소모품 교체는 의미 없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그 깨달음이 없이는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해법 없이 소모품을 연료로 바라보는 소비자의 인식은 그대로일 것이며, 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HP 소모품이 비싸다는 인식에 따른 비판도 두고두고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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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tsol Written by:

11 Comments

  1. 에스테리아
    2007년 6월 9일
    Reply

    비싸긴 비싸죠. 아무리 정품 좋다 노래를 불러도 표면적으로는 싼 리필에 손이 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아닐지..

    • 2007년 6월 9일
      Reply

      그렇죠.. 당장에는 리필이 더 싸게 보이니.. 소비자 인식 전환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 같습니다.

  2. 모스
    2007년 6월 9일
    Reply

    구형 프린터 고장나면 AS 되는둥 마는둥이던데요. 소모품이 새 프린터 가격이랑 같으면 나중에 AS 생각해서 새 제품을 사는 게 젤 현명한 일일 것 같아요.

    • 2007년 6월 9일
      Reply

      지금 시점에서는 모스님의 말이 정답 같습니다. ^^

  3. 2007년 6월 11일
    Reply

    HP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네요…=_=;
    차 값이 65만원이고… 엔진 교체비용이 62만원이고…엔진은 주기적으로 고장나서 교체해야 한다면… 엔진을 교체할 건지 차를 바꿀건지..ㅋ…

    • 2007년 6월 11일
      Reply

      “농담삼아 하는 얘긴데 나 같으면 차를 바꾸겠다”고 했더니 술 한 잔 마시면서 나중에 이야기를 하자더군요. 결국 같은 술자리에 앉지 못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지요 ^^

  4. 2007년 6월 21일
    Reply

    프린터가 고장났다. 내가 쓰는 프린터는 PSC 1210 으로 이른바 국민 복합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메이커 컴퓨터를 사면, 부록으로 자주 주던 모델이다. 그런데 이 복합기가 더위를 먹었는지 E 메..

  5. 2007년 6월 26일
    Reply

    엔진 교체해야 되면 쓰던 엔진 가격이라도 어느정도 받아주면 모르려만… 너무하네요 -_-);

    • 2007년 6월 27일
      Reply

      그러게요.. 엔진 가격의 보상을 소비자들이 원하지만, HP는 수거된 엔진을 재활용하지 않고 전부 뽀개서 화분으로 만든답니다. 그래서 보상을 해줄 수 없다죠. ^^

  6. 2007년 8월 16일
    Reply

    여러분 혹시 무한잉크 를 아세요? 이미 오래 전부터 용산이나 테크노마트에서 판매되던 제품입니다. 한마디로 카트리지의 교환없이 반영구적으로 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를 말합니다. ..

  7. 1990년대 초에 학교 리포트는 펜이나 샤프를 이용해 필기를 해서 제출하곤 했다. 컴퓨터 보급이 확산되고 대학에 전산실이 생겨나면서 1990년대 중반에는 반듯하고 깔끔한 프린터 출력물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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