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와 프린터 합친 HP가 노리는 것

‘또’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상황에서 ‘또’라는 말은 이상할 게 없다. HP가 PC와 프린터 사업부를 합친다는 어제의 발표는 처음은 아니니까. HP는 이미 칼리 피오리나가 CEO였던 2005년에 이러한 시도를 했었다. 다만 6개월 뒤 그 계획이 뒤집어졌을 뿐이다. 그것을 뒤집은 것은 성희롱 건으로 물러난 마크허드였다. PSG를 분사 또는 매각하려던 레오 아포테커의 계획이 무산되면서, PSG를 잔류시키기로 했던 맥 휘트먼 현 CEO는 결국 프린터 사업부와 통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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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휘트먼 HP CEO
어제 HP는 PC 사업부인 PSG와 프린터 사업부인 IPG를 합치면서 글로벌 어카운트 영업부를 엔터프라이즈로 이관시키며 CMO(Chief Marketing Officer) 산하로 마케팅 기능을 통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직 개편을 공식 발표했다. PSG와 IPG 사업의 통합에 대한 소문은 전날 올씽스디에 의해 퍼졌지만, 단지 HP는 이 소문의 확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PC와 프린터의 통합이 가장 큰 덩어리긴 해도 지금 HP가 진행 중인 체질 개선의 진행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 발표였다는 것이다. 이번 발표로 31년 동안 HP에 근무하며 IPG 사업부를 이끌었던 비요메시 조시 수석 부사장이 은퇴를 하고 PSG를 이끌던 토드브래들리 수석 부사장이 통합 사업부를 이끌게 됐다.


이번 개편의 외형적 이유는 명백히 비용 절감이지만, 단순한 비용 절감은 아니다. 당장 수익을 개선하기 위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재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체질을 바꿔 힘을 축적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는 HP는 공식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이야기다. HP는 “이번 두 덩어리의 결합은 전세계에 걸쳐 HP의 시장 접근(go-to-market) 전략, 브랜딩, 공급망과 고객 지원을 합리화 할 것이며, 개인 컴퓨팅 및 인쇄 전반에 걸쳐 더 나은 고객 경험과 드라이브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의미를 전하면서, 결국 “이번 조직 재배치는 비용 절감과 수익성 있는 성장을 위한 능력을 가속화하며 사업에 재투자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번 통합에서 노림수는 비용 절감만이 아니다. 느려터진 의사 결정 구조를 바로 잡는 일도 포함되어 있고, 연구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목적도 들어 있다. 단순히 지지부진한 PC 사업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프린터 사업의 이익 감소 같은 부진의 문제에서 볼 게 아니라 두 덩어리를 합치면서 의사 결정이 빨리 이뤄지지 못하는 내부 복잡성 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바꾸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두 조직을 합쳐서 낼 수 있는 시너지도 고려 대상이겠지만, 둘을 합치든 안 합치든 6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무작정 실적이 좋아질 리는 만무하다. 다만 마케팅 조직의 통폐합을 통해 브랜드 가치의 손실 없이 40억 달러의 마케팅 예산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맥휘트먼은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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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열린 HP 글로벌 파트너 컨퍼런스에서 각 사업부 임원들이 소개되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통합 PC&프린터 사업부를 이끌 토드브래들리 수석 부사장이고, 그 오른쪽이 은퇴를 결정한 비요메시 조쉬 수석 부사장이다.
이러한 체질 개선은 몇 년이 걸릴 지 모른다. 통합은 발표했지만, 이 혼란을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고 어제 주주들과 연례 회의에서 맥휘트먼이 말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변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공감대가 있고 예전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계획은 이사회 승인을 얻어 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도 적은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PC와 프린터를 통합한 HP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업부에 따라 HP PC와 HP 프린터로 명확하게 갈렸지만, 그 경계가 사라지게 될 앞으로 이 사업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각 사업 영역이 달랐던 만큼 시장에서도 걱정의 목소리가 있다. 특히 프린터와 PC가 서로 분리된 사업 영역에서 파트너 문화를 지켜왔는데, 이에 대한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달 글로벌 파트너 컨퍼런스에서 채널 파트너와 함께 성장해 온 관계를 역설하며 겨우 진정시킨 효과가 채 한달도 되지 않아 꺼지게 생겼다.


아마도 이러한 우려의 대부분은 예상된 것들일 것이고, 그래도 핵심 비즈니스의 성장을 위해선 지금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HP가 성장을 위한 투자는 계속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중 지난 달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HP 글로벌 파트너 컨퍼런스에서 맥 휘트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HP는 연구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이다. R&D에 투자하지 않으면 기술의 혁신을 가져 올 수 없다. 이는 성공하지 않겠다라는 것과 같다. 나는 이베이 시절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거래 구조를 알고 있기 때문에 IT환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이런 경험을 앞으로 HP의 발전을 위해 적용시킬 것이다”


만약 휘트먼의 연설을 듣지 않았다면 이번 개편을 통상적인 비용 절감 차원의 구조 조정 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3천 명이 넘는 파트너들 앞에서 성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미 말했는데, 그 방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One Comment

  1. 2012년 3월 25일
    Reply

    HP가 7년만에 다시 PC 사업부(PSG)와 이미지 프린터 사업부(IPG)를 하나의 사업부로 통합시켰다. 2005년 1월 Carly Fiorina가 분리되어 있던 두 사업부를 통합했었고, 후임 CEO Mark Hurd가 다시 그해 6월 두 그룹을 분리했었다. 당시 PSG와 IPG의 사업부 분리를 두고 사업부 매각의 신호가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지만, 그 뒤로 두 사업부는 HP의 핵심 비즈니스 역할을 수행했다. 통합부서에서 다시 분리되면서 영입된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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