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대여점을 삼켜버린 자판기

▶ 1.
이달 초였을 것이다. 동네 DVD 대여점 하나가 폐점을 했다. 폐점을 끝낸 매장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지만, 폐장 직전의 풍경은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사르는 성냥개비처럼 으레 뜨거운 분위기다. 파격적인 할인 판매를 알리는 플랭카드 한 장 때문에, 그동안 장사가 되지 않아 폐점을 하는 주인의 쓰라린 속과는 반대로 이 기회에 소장하고픈 DVD를 몇 장이라도 싸게 사서 장식장에 꽂아 두려는 이들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 무리 중에 하나가 되어 진열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몇 장의 DVD를 골랐다. 앨리어스 시즌 2 세트와 대여용이 아닌 가정용 DVD 패키지 몇 개를 골라서 계산대에 올려 놓았다. 하지만 난 단 한 장의 DVD도 살 수 없었다. 아니, 사지 않았다. 사실 폐점하는 마당에 설마 제 가격을 받겠냐는 섣부른 추측과 적당히 흥정해 볼 요량으로 이런저런 타이틀을 골랐지만, 에누리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2천 원이라는 주인의 말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현금을 주고 사려고 했던 터라 은근히 더 많은 할인을 바랐지만 이마저도 통하지 않자 포기해버린 것이다. 때문에 골라 놓은 DVD를 판매대에 그냥 두고 나가려는 내 등 뒤에서 한 술 더떠 카드 결제가 된다고 말하는 주인이 그리도 밉살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골라 놓은 DVD 중이 세 개 정도는 꼭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갖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나 할인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전 정보-주인의 성격이나 할인폭이 적은 것으로 분류되는 DVD 같은-를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판매자나 구매자 사이에 흥정에 따른 양쪽의 융통성이 없던 게 가장 크다. 손해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가격에 고수하려는 판매자와 더 싸게 사려는 나 사이의 범위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처럼 사람을 앞에 두고 흥정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기계에서 물건을 뽑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날도 매장 문을 나서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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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런데 며칠 전, 비를 피하려고 회사 앞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자판기 하나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슨 기계인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자판기를 자세히 보게 됐을 뿐이지만 꽤나 흥미로운 장치였다. 바로 DVD 대여 자판기였기 때문이다. 네모난 철제 상자와 숫자 버튼, 카드 슬롯, DVD 반환용 슬롯, 모니터 하나를 갖춘 이 장치 하나가 그동안 사람이 맡아서 하던 일을 대신 하는 것이다.

사용법은 그리 복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편의점에서 회원 카드를 발급받은 뒤 DVD 번호를 누르고 돈을 넣으면 원하는 DVD가 나오는 것이다. 영수증도 받을 수 있고, 반환도 이 자판기에 하면 된다. 이용료는 2박3일에 2천원, 연체료는 1천 원이다. 15일 연체하면 연체료가 휴대폰 요금에 합산되어 빠져나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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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실 그 자판기의 내부 구조가 어떤지, 얼마나 많은 DVD가 들어 있는지,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디지털 장치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계의 속까지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다만 편의점이라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진열대를 둘 필요 없이 기계 한 대가 DVD 대여점 몫을 해낸다고 생각하니 정말 DVD 대여점이 무슨 필요가 있나 싶을 뿐이다

앞서 융통성 없는 DVD 대여점의 주인을 보면서 이런 자판기가 차라리 낫겠다 싶기도 한데, 오히려 이 자판기를 보면 볼수록 씁쓸하기만 하다. 한 사람, 한 가족의 생계가 달린 일터가 이런 기계에 빼앗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 기계의 주인이나 기계를 만드는 이들도 모두 똑같이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일테지만, 기계가 대신 벌어주거나 기계를 팔아 얻는 일회성 수익을 매장을 지키면서 정성껏 청소를 하고 DVD를 깨끗하게 닦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면서 얻는 비록 몇푼 안되는 이문이 주는 의미와 비교할 바는 아닐 것이다.

기계보다 더 기계적이었던 주인이 운영하던 매장의 폐장은 자판기가 들어설 구실을 만들었다. 경쟁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에서 공간과 시간 대비 노동의 효율성이 뛰어난 이 자판기 같은 기계들에게 일터를 빼앗기는 일은 정말 서글프지만, 그래도 사람에게는 기계에 비할 수 없는 경쟁력은 분명 있다고 믿고 있다.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옆집 꼬마 단골의 안부를 묻는 정이 많은 주인의 DVD 매장은 자판기의 존재를 잊게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 기계가 표현할 수 없는 웃음, 기계가 기울일 수 없는 관심, 기계가 베풀 수 없는 친절, 기계가 발휘할 수 없는 융통성, 그리고 기계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정’. 사람의 경쟁력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닐까?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13 Comments

  1. 2007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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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쉐이크를 좋아해서 맥도날드에서 가끔 사먹는데, 가끔 사료먹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저 DVD 자판기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시대라는 것이 한마디로 ‘Californication’이랄까요… 모든게 자본이랑 자동화에 밀리고 파괴되는 느낌이에요

    •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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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 먹는다라.. 적절한 표현이네요. 자고로 우리나라 음식은 조리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패스트푸드는 가공의 과정만 있는 것 같으니… 돈 좀 적게 벌어도 세상이 천천히 달려만 준다면 햄버거가 아니라 밥을 해먹을 여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ㅡㅋ

  2. 2007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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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도 이런 자판기타입의 DVD대여기기가 있습니다.
    맥도날드앞에 있고 마트안에도 있고 하더라구요.
    그것때문에 미국 DVD대여점인 블록버스터는 가격을 내리고 신작들도 7일까지 늘렸더군요..

    •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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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기계가 경쟁도구가 된 셈이군요. 여기야 DVD 대여점의 가격이 저 자판기보다는 싸기 때문에 자판기 자체의 경쟁력이란게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점점 개인화되는 사회에서 자판기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겠죠. -.ㅡㅋ

  3. 2007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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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저는 처음 보는 물건이네요.

    •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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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회사 앞 편의점에 먼저 설치된 모양이네요. 언젠가는 동네 편의점에서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4.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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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조그마한 음반 매장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젊고 예쁜 아가씨였던 주인 누나가 지금은 애가 둘이나 있는 아줌마가 되었습니다만… 뭐랄까. 특별히 일 없어도 놀러가고 싶고 돈은 있는데 마땅히 사고 싶은 음반 없으면 ‘요즘 수입음반 중에 들을만한 신보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추천도 잘 해 주시고.. 그런 가게가 있지요. 주말마다 가 보면 동네에 음악 좀 좋아한다는 친구들이 다 몰려있지 않나 싶기도 한 그런 분위기의 가게입니다. 음반시장이 불황이라는 요즘에도 그 가게만은 항상 손님들이 있지요.

    인터넷 쇼핑몰과 자판기의 시대에는 이런 가게가 살아남는 법이라고 봅니다.

    •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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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싯적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옆집 누님이시로군요. ^^

      정말 자판기와 온라인 쇼핑몰의 시대에 살아 남으려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최고다 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살갑게 이름을 불러주며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 더욱 그리워지더군요. 그렇죠? 나인테일님? ^^

  5.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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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주변 대여점이 전부 망해버려서…놀때 영화 보려고 해도 난감한 상황인데요,
    저런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어째튼 시대가 점차 변해가는가 봅니다.

    • 2007년 8월 15일
      Reply

      동네에 대여점이 없다면 이 기계가 딱이긴 하군요. -.ㅡㅋ Draco님이 한 대 사셔서 근처 편의점에서 영업을 하심은… ^^

  6.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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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가나 정나미 넘치는 사람들은 경쟁력이 있지요. 경쟁사회에서 이윤을 위해 원가절감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사고 팔고 만드는 것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 사람과 사람사이에 끈끈한 다리를 잘 놓는 이들은 원가절감 못지 않게 이윤을 가져다줄 매우 경쟁력 있는 사람들이지요. ^_^

    • 200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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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게 중요한데요. 영등포였나요? 총각네 채소가게 말입니다. 그곳 가게 주인의 이야기은 당일 들어온 물건을 당일에 판매하는 것뿐 아니라 한번이라도 찾은 손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정겹게 서비스를 해 단골이 끊이지 않았다더군요. 원가 이상의 보너스는 바로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

  7. 2007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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