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어야 할 이유보다 뽑아야 할 이유가 중요하지 않을까?

얼마 전 윈도 부팅이 되지 않았을 때 사진이 날아갔을까 봐 노심초사했다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 때 영영 없어진 줄 알았던 사진들은 대부분 찾았지만, 그래도 바탕 화면에 남겨 두었던 몇몇 사진은 결국 되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어떤 사진이 날아간 것인지 벌써 기억을 못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풍경이었는지, 다른 이와 찍은 사진이었는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사진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사진 중에 한 두 장 사라진 게 대수는 분명 아니리라 여기고는 있지만, 먼 훗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을 온전히 되살려 줄 그 사진이 이 때 없어진걸 알게 되면 아무래도 서운한 마음에 자책할 것만 같다.

이미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인 것을 어쩌겠느냐면서도 아쉬움을 곱씹는 것은 단지 나만의 사진으로 남겨뒀거나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았다거나 백업을 제때 해두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후 관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디카든 휴대폰이든 버튼만 몇 번 눌러 바로 사진을 담는 게 일상처럼 되어 버린 요즘, 거의 일회용처럼 흘러다니는 디지털 사진들이 앨범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진만큼 정겹게 보이지는 않아서다.

물론 디지털로 보는 사진 앨범은 꽤 재미있다. 무엇보다 정적이지 않다. 다양한 트랜지션으로 사진을 넘기기도 하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도 들려준다. 그러나 사진을 보면서 사색해야 할 때, 그 모든 것은 방해가 된다. 사진을 즐기는 것과 간직하는 것을 둘로 나눠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비중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수백 장의 사진을 영화처럼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은 즐기는 쪽, 한 장의 사진만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아날로그는 간직하는 쪽이 더 무거웠다고.

그런 면에서 내 사고는 아날로그적이다. 남들은 그 사진을 디지털 세계에서 공유하고 잘 써먹기도 하는데, 나처럼 디지털 사진의 소비처가 별로 없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인화된 사진 한장을 꽂아둔 앨범이 그립다. 사진의 ‘사’자도 관심이 없었으면서도 가끔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앨범에 고이 보관해 두었다가 꺼내 보는 사진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화면으로 보는 디지털 사진들은 왠지 차갑기만 하다. 디지털 TV, 디카, PMP, 노트북 같은 온갖 디지털 장치에 달린 디스플레이 속 화소들로부터 인화된 사진 속 잉크가 주는 느낌을 받지는 못한다. 화면을 보는 것과 사진을 만지는 것에서 오는 다름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디지털 사진을 찍으면서 이 사진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았다. 애초에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그대로 있을 줄 알았고,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좀 바꿔야겠다. 모든 사진을 다 버려도 좋으니 남겨야 할 이유가 있는 사진은 꼭 뽑아 두겠다고 말이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이유보다 한 장의 사진을 뽑아서 남겨야 할 이유가 더 중요한 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일까?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11 Comments

  1.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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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요즘 사진 정리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인화할려고 수십기가에 이르는 사진에서 추려보고 있었는데…..

    막상 인화할 사진은 얼마 안되더군요…

    웬지 필카때의 한장 한장이 소중했던 그 시기가 그리워지네요..

    -마음가는 길은 곧은 길-

    •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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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정리를 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그 많은 사진 보시느라 눈 안빠지셨는지 모르겠네요. ^^; 전 아직 손도 못대고 있답니다.
      -마음 가는 길은 곧은 길- 이라… 저도 늙어죽을 때까지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2.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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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은 아니지만 저는 디카로 찍을 때부터 인화를 고려합니다. 맘에 안들면 바로 삭제하고 다시 찍고 그러죠. 메모리에 저장된 사진은 ‘사진’이 아니죠. 단순한 ‘이미지’일 뿐. 사각형의 인화지를 만져가며 바로보는 사진이야 말로 흘러간 시간의 기억과 느낌들을 되살려주는, 사진의 진정한 의미가 부여된 귀중한 소장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_^

    •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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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요. 지인우인님처럼 저도 이제는 뽑을 수 있게 생각하고 찍어봐야겠습니다. 이왕 뽑는 거 변치 않는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말이죠. ^^

  3.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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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가장 큰 즐거움은 모니터로 보는것이 아닌 인화지에 나온 사진을 보는것이 아닐까 합니다…특히나 흑백사진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포토샵으로 멋지게 한다고 해도 직접 현상해서 인화한 것에 비교할 수 가 없죠…
    스스로 인화해서 뽑아보는 사진의 만족감은 모니터를 보면서 조절하는것과는 다른것 같아요…^^

    •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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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CMS를 해놓지 않은 이상 디스플레이 장치마다 보이는 사진이 다 달라서 내가 찍은 사진이라도 느낌이 많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인화지로 딱 한 번 뽑아서 갖고 있으면 하나의 느낌만을 갖게 될 것 같더군요. 진지하게 사진 인화를 배워야겠습니다. ^^

  4.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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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저보고 상당히 시대와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합니다.맞는 말입니다.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사실 조그만 똑딱이 디카가 있긴 하지만 잘 쓰지 않..

  5. 不LOG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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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죠… 섹스도 잘싸야 제맛인데.. 아무리 많이 할수 있다고 해도… 그냥 디카 셔터누르듯 아무것나 막 들이대는게 아니라.. 정말 소중한 순간 중요한순간에 아껴서… 한방… 그게 필카와 섹스의 공통점이죠… 분명…
    그러다 정말 작품이 나왔을때의.. 오르가즘… 필카만의 매력이죠…

    • 200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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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 사진과 섹스의 희열을 절묘하게 매칭시키시다니,재치가 넘치십니다. 필카의 매력에 한 번 빠져 볼까요?

  6. 2007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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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카를 쓰면서 일단 들이대고 찍다보니 사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감이 있네요.
    추억이 아닌 기록차원의 사진들이 많아지다보니… 정성이 많이 부족해 지는 것같기도하고^^;;

    • 2007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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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를 살다보니 추억보다는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게 훗날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SuJae님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정성을 쏟지 않으실까요? 사진을 정리하시어 앨범 하나 만들어보는 것도 정성을 위한 노력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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