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블랙베리 9800 토치와 블랙베리 볼드 9900이라는 두 개의 블랙 베리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두 물건은 아직 유물이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그래봐야 3~4년 전에 나왔던 제품이니까. 그럼에도 블랙베리에 관해 물어볼 수 있던 한국 지사는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않은 채 2년 전에 떠난 데다 실적 그래프마저 돌아오기를 기대케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유물처럼 보존해 둬야 할 때라 그럴 것이다.
아마도 블랙베리의 지금 상황이 아까운 데는 이 스마트폰이 갖고 있는 독특함 때문일 게다. 하드웨어의 생김새 뿐만 아니라 블랙베리 운영체제(BBOS)와 블랙베리 메신저(BBM) 등 이 독특한 환경은 확실히 다른 색깔을 냈다. 보안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폐쇄성을 추구한, 그런 이유로 생태계 형성에 실패했으나 신사적으로 보일 만큼 정갈한 품격은 블랙베리를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은 넘쳤다. ‘곰 발바닥’으로 일컬어지는 BIS 아이콘을 잊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어쩌면 블랙베리는 이제 이 정도의 추억만 간직하는 것으로 끝날 스마트폰이었다. 하지만 블랙베리 프리브(BlackBerry Priv)를 본 이후 블랙베리의 추억이 조금 더 연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잠시나 둘러본 블랙베리 프리브는 그것을 본 시점에서 우리가 알던 블랙베리의 기억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했다. 답답하고 불편한 화면에 안녕을 고하고 운영체제와 BIS의 폐쇄성은 사라졌으며 품격은 더 높였으니까.
물론 이 블랙베리 프리브를 아주 오래 둘러본 것이 아닌, 그저 첫인상에 불과한 데다 편견이 클 수도 있다. 블랙베리의 폐쇄성을 버리고 안드로이드를 채택한 것은 고유의 색깔을 찾을 수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오히려 이용자들은 더 좋아할 이유가 충분해졌다. WQHD(2560×1440) 해상도의 5.4인치 화면에 안드로이드를 얹은 블랙베리를 터치스크린으로 다루는 것은 블랙베리를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블랙베리를 모르고 있던 이들에게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편의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또한 더 이상 에뮬레이터에 의존할 필요 없이 그냥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 됐을 뿐이라 해도 잘 만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찾는 이들에게 기꺼이 블랙베리 프리브도 이름을 불러주고 싶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마치 갤럭시 S6 엣지, 노트4 엣지처럼 화면 양 옆을 살짝 구부려 사용성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기품 있게 만든 화면부, 멋진 블랙베리 문양을 새긴 뒤판, 툭 튀어 나왔으나 멋스럽게 장식한 카메라 등 그 무엇과 견주어도 뒤질 게 없을 만큼 멋스러운 몸매로 다듬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화면을 위로 슬며시 밀어 올렸을 때 드러나는 블랙베리 키보드다. 블랙베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 전매특허, 블랙베리 키보드는 블랙베리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비록 한글화가 되어 있지 않아도, 한글 전환을 위한 키가 없어도 쿼티 키보드를 얹은 블랙베리는 그 자체만으로 반갑다. 블랙베리 볼드에서 보던 전통적인 키보드를 그대로 이식한 풀터치 안드로이드 블랙베리.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는 안드로이드 생태계 안에서 블랙베리는 여전히 진하고 분명한 색깔을 드러낸다.
하지만 블랙베리 프리브는 블랙베리의 달라진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와 같기도 하다. 과거의 영광을 앞세워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는, 이제야 시대에 순응했다는 메시지가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베리 자체가 잊혀져 가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새로운 충격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추억 속 블랙베리에 견줘 달라진 블랙베리인 것은 맞긴 하나, 블랙베리 프리브 하나만으로 스마트폰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돌아왔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그저 새로운 신뢰를 위한 첫 단추를 잘 뀄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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