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D를 좀 써본 사람들은 제품을 고를 때 제원에서 꼭 확인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SSD의 저장 영역을 구성하는 플래시 메모리의 셀 구성을 살피는 것이지요. 이들은 한 셀에 몇 개의 비트를 담아내느냐는 플래시 메모리 저장 방식에 따라 그 제품의 대략적인 성능을 평가해온 게 사실입니다. 하나의 셀에 단일 비트(bit)를 담는 SLC(Single Level Cell), 두 개를 담는 MLC(Multi Level Cell), 3개를 담는 TLC(Triple Level Cell) 등으로 구분되는데, 셀에 정보를 적게 담는 방식일수록 성능과 내구성이 좋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져 왔거든요.
문제는 용량 대비 단가입니다. 분명 하나의 셀에 하나의 비트만 담으면 성능과 내구성은 좋아질 수 있지만, 같은 크기의 플래시 메모리에서 용량을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하나의 셀에 여러 비트를 담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한 땅에 지은 단독 주택 하나를 나 홀로 쓰는 것이라면 이제는 같은 크기의 땅에 연립 주택을 짓고 여러 세대가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도록 한 셈입니다. 하지만 공간 효율성이 좋은 저장 방식의 플래시 메모리를 쓰면 용량을 늘릴 수 있으나 반대로 성능이나 내구성이 떨어지는 한계는 분명 있었습니다. 그나마 안정기를 지나고 있는 MLC와 달리 아직 3개의 비트를 저장하는 TLC는 여전히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샌디스크 코리아가 27일 발표한 X400은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2.5인치 크기와 M.2 형태의 SATA 인터페이스로 작동하는 TLC SSD인데, 종전에 알던 TLC의 상실을 깨는 제품이기 때문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샌디스크가 TLC에 대한 거부감을 이미 알고 그에 대한 브리핑을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제품을 준비했다는 말이 맞겠네요.
방금 말한 대로 X400은 TLC 방식 플래시 메모리를 씁니다. 최대 용량은 1TB까지 고를 수 있는데, 양면이 아니라 단면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5인치에는 큰 의미는 없지만, 얇은 울트라북이나 태블릿에 들어가는 M.2 크기의 SSD에서 단면은 제품의 두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단면으로 SSD를 구성한 덕분에 가장 얇은 1.5mm 두께로 내놓을 수 있었지요. 여기에 전력 소비도 줄여 노트북이나 태블릿의 배터리 효율성을 높였고, 그에 따른 발열까지 줄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대목은 역시 TLC의 성능과 내구성입니다. 샌디스크가 꽤 자신감을 갖고 발표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샌디스크는 같은 용량을 가진 MLC SSD와 벤치마크를 통해 TLC를 쓴 X400이 종전 MLC 방식에 견줘 성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셀에 담는 공간이 늘어날 수록 쓰는 시간이 느려지는 약점을 덮었다는 것이지요. 샌디스크가 쓰기의 성능 저하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것이 캐시입니다. 대부분의 저장공간은 TLC로 구성하지만, 극히 일부에 SLC를 넣어 쓰는 속도의 저하를 막기 위한 캐시로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날 발표를 맡은 수하스 나야크 샌디스크 제품 매니저는 “SLC 캐시가 없는 TLC SSD였다면 25~30%의 성능 저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X400 제품군에 따라 SLC의 용량에 차이를 뒀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기업 비밀이라며 밝히길 꺼려하더군요.
그렇다면 수명은 어땠을까요? 샌디스크는 1TB 기준으로 하루에 20GB를 쓸 때 45년, 80GB를 쓸 때 11년 동안 쓸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128GB나 256GB 같은 저용량은 상대적으로 짧지만, 웨어 레이블링 알고리즘으로 돌려쓰기 공간이 넓은 1TB는 한결 오래 쓴다는 이야기지요. 물론 매일 80GB 이상을 쓰고 지우는 작업을 한다면 그 정도 수명이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업무용으로 쓰는 제품에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샌디스크가 TLC로 작동하는 X400의 성능과 안정성을 강조하고 나온 데는 올해 SSD 시장이 TLC로 넘어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량 대비 단가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해질 것을 감안하면 결국 TLC의 성능과 안정성을 서둘러 확보하고 이를 시장에 알려야만 합니다. 서버와 같은 엔터프라이즈 시장은 여전히 시간을 두고 움직여도 되는 반면 소비재 시장은 TLC로 완전히 이동할 것으로 보고 올해 소비재용 SSD는 TLC 방식만 공급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샌디스크의 이 같은 결정이 옳은 판단일지 도박일지 아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TLC SSD에 대한 이용자의 오래된 편견을 깨는 일이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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