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북, 느림의 미학을 깨닫게 하다

최근 e북 리더인 비스킷과 물건너 온 아이패드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져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둘은 확연히 다른 장치입니다. 비스킷은 e북을 읽을 수 있는 전용 단말기인 반면, 아이패드는 e북을 포함한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융복합 장치니까요. 장치의 성격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대의 장치였습니다.

사실 두 장치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비스킷보다 아이패드쪽에 대한 관심이 더 컸습니다. 워낙 소문도 많았고, 일찍이 2G 아이폰과 3GS에서 경험했던 애플 제품의 완성도를 고려했을 때 무엇을 하든 아이패드 쪽에 무게를 더 얹었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e북을 보더라도 지금처럼 색깔을 많이 쓰고 있는 요즘 출판 현실을 본다면 명암의 단계만 조절하는 e북보다는 LCD를 선택한 아이패드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관한 글도 올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두 기기를 휴대하고 난 뒤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저도 의외였지요. 아이패드가 빠르고 조작이 편하고 다루기 쉬운 장치인 것은 분명하지만, 들고다니면서 다루는 장치라는 점에서 조건에서 e북 단말기가 가진 새로운 경쟁력을 이해하게 됐다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아마도 지금까지 빠르게 작업을 수행했던 수많은 터치 장치를 쓰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겁니다

물론 e북 단말기는 단점이 매우 많은 장치입니다. 특히 e북을 짧게 만져본 이들은 대부분이 이런 반응을 내놓습니다.

“너무 느려요.”
“반응이 왜 이렇게 답답하죠?”

네, 맞습니다. e-잉크를 쓰는 e북은 무척 느립니다. 지금 빨라야 1초에 두번 정도 화면을 바꿀 수 있는 수준입니다. 처리 능력의 문제도 있지만, 표시 능력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e-잉크의 성질이 바뀌지 않는 한 한동안 변할 수 없는 문제일 겁니다.

인터페이스는 또 어떤가요? 비스킷을 비릇한 e북 단말기를 터치형 장치를 쓰던 이들에게 보여주니 하나 같이 화면을 먼저 누릅니다. 큰 화면이 눈에 보이는 모바일 장치라는 인식 때문에 이들은 화면부터 터치 합니다. 버릇인 거죠. 터치가 안된다고 하니 몇몇 분들은 어려워 합니다.(물론 터치가 되는 e북도 있습니다. 소니 PRX-600이나 삼성 SNE-60K는 터치가 되죠. 특히 소니 PRX-600은 터치 감도도 매우 훌륭합니다.)

또한 컬러도 안됩니다. 요즘 화려한 사진이 들어 있는 사진이나 요리 관련 책은 정말 그림의 떡입니다. 더구나 기능도 거의 없죠. 독자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모든 e북 단말기의 약점이 이렇게 많아도 알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시간을 갖고 e북 단말기를 쓰다 보면 e북이 더 편해지는 게 아이러니 합니다. 느리고 조작도 어렵고 컬러 문서도 못보는 e북 단말기가 편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일 수밖에 없지요.

물론 새삼스러운 기능이 있거나 숨겨진 비밀은 아닙니다. 늘 e북 단말기의 특징으로 꼽는 편안함 때문일 뿐입니다. e-잉크로 쓴 글과 그림을 볼 때의 편안함과 얇은 단말기의 휴대성이란 장점이 시간이 지나도록 꾸준하게 유지되는 것 뿐입니다. 단지 이러한 장점을 이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하철에 서서 한 손으로 책을 읽을 때,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e북 단말기 속 소설 책을 읽는 것처럼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분명 처음 만질 때는 그 느릿느릿한 동작 때문에 갑갑하지만, 시간을 갖고 그 느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한 것이 e북 단말기입니다.

참 알 수 없죠. 매번 빠르고 다루기 쉬운 장치를 요구하는 데, 이렇게 느리고 불편한 것에 이해를 구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e북 단말기의 그 느림에 한번 맛들여 보니 꼭 빠른 세상에만 익숙해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늘 급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e북 단말기처럼 느린 장치가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올 줄은 사실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빠른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조금은 느리게 기다리면서 사는 것도 괜찮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e북 단말기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저 단순한 하드웨어인 줄 알았더니 우리 삶의 일부로서 의미를 깨우치게 만드는 장치가 e북이었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