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텔 아톰 프로세서에 넣고 있는 마이크로아키텍처는 본넬(Bonnell)이다. 이 연산 체계는 2004년부터 설계를 시작해 2008년에 공식 발표되었다. 이 마이크로아키텍처는 지난 넷북과 넷탑 등에 들어가는 저전력 아톰 프로세서의 뼈대였지만, 지금까지 이 체계를 개선만했지 크게 바꿔서 내놓지는 않았다. 그동안 틱톡 전략에 따라 연산 체계와 공정을 번갈아가며 꾸준하게 개선해온 코어 프로세서와 비교하면 아톰 프로세서는 해마다 기존 뼈대에 살만 붙여 그때그때 재활용하며 지금까지 버텨온 셈이다.
이러한 재활용 정책을 쓰는 동안 아톰은 시장에서 빠르게 후퇴했다. 2008년 발표 당시만 해도 아톰은 성능면에서 ARM보다 분명한 우위에 있었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모바일로 이동하는 산업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저전력을 기반으로한 고성능 마이크로아키텍처까지 아우르기 시작한 ARM에 모바일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저전력 컴퓨팅 시대에 아톰 프로세서가 시대를 주도하지 못하고 기존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기조차 버거운 애물단지로써 평가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것은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적 이미지를 가진 기업 목록에서 인텔을 제외한다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제 인텔이 발표한 새로운 저전력 마이크로아키텍처인 ‘실버몬트'(Silvermont)는 지금까지의 평가를 유보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톰 프로세서를 위한 새로운 이름의 저전력 마이크로아키텍처를 만나는 데 무려 6년이 걸렸지만,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구조가 바뀐 때문이다. 비록 44나노에서 32나노의 공정을 적용한 솔트웰(Saltwell)이 있었다고는 하나 연산 체계가 바뀌고 22nm 미세 공정이 동시에 적용되는 실버몬트는 모처럼 기대감을 갖게 한다.
종전 아톰 프로세서의 마이크로아키텍처는 입력된 명령을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는 분기 예측에 따라 명령의 처리 순서를 바꾸는 비순차적 실행 파이프라인을 도입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프로세서 안에서 처리 자원을 좀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방법으로 전력의 증가 없이 좀더 빠르게 연산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이는 코어 프로세서에 적용되어 있는 구조다. 이전 시스템의 매크로 명령 실행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명령 처리의 지연시간과 처리량 개선, 효율적인 파이프라인 자원 관리 등이 추가됐다. 여기에 효율적인 분기 처리와 정확한 분기 예측, 그리고 이에 실패했을 때 빠르게 파이프라인을 복원함으로써 전력 효율을 개선하는 데에도 신경썼다. 캐시 접근의 지연 시간을 줄이고 대역폭이 높아져 메모리에 접근할 때 효율성과 속도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의 아톰 프로세서가 적용될 환경에 맞는 프로세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코어 확장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는 2개 코어와 1MB L2 캐시가 하나의 세트에 담긴 모듈 형으로 만들어지고, 이러한 모듈을 4개까지 추가해 최대 8코어의 프로세서를 설계할 수 있다. 물론 싱글 코어로도 설계할 수 있지만, 아마 보편적 환경은 듀얼코어부터 시작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밖에도 좀더 많은 확장 명령어 세트가 추가되었고 서버 관리 명령어 세트인 VT-x2와 VMFUNC 등 가상화 소프트웨어를 위한 가속 명령어 세트와 OS의 공격을 차단하는 인텔 OS 가드 등도 더해졌다. 이처럼 마이크로아키텍처를 개선하고 22nm 트라이게이트 공정으로 저전압의 성능과 누설 전력을 줄였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실버몬트에 터보 부스트와 비슷한 기능을 담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온도의 여유가 있다면 클럭과 전압을 올려 각 코어와 GPU의 성능을 상황에 따라 높이거나 각각 따로 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코어가 작동하지 않는 대기 상태(C스테이트)는 이전 아톰과 거의 비슷하지만 운영체제가 떠 있는 상태에서 프로세서의 대기 전력을 거의 없앤 상태로 작동할 수 있고 대기 상태에서 돌아오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인텔은 태블릿에서 쓰일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가 종전 솔트웰과 비교할 때 싱글 코어 싱글 스레드에선 2배의 성능 향상과 4.7배의 전력 감소를, 듀얼 코어 4스레드의 솔트웰과 4코어 4스레드의 비교에선 2.8배 성능 향상과 4.4배 전력 감소가 나타났다는 실험 결과를 공개했다. 즉, 더 많은 코어를 써서 고성능을 내더라도 전력은 더 줄였다는 이야기다. ARM 기반의 쿼드코어와 비교해도 듀얼 코어 실버몬트가 성능과 전력 면에서 성능은 1.6배, 전력은 2.4배 더 나아졌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ARM 마이크로아키텍처와 비교한 것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성능과 전력 효율성이 한결 좋아진 저전력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의 등장으로 모바일부터 엔터프라이즈까지 저전력이 요구되는 모든 환경에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2008년 아톰 프로세서를 공개할 당시 인텔은 산업용 임베디드, 가전용 임베디드, 넷북/넷탑,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MID(Mobile Internet Device)로 아톰 제품군을 나눴으나 이제는 데이터센터용 저전력 서버 시장까지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텔이 새롭게 꺼내 든 신무기인 셈이다.
물론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가 실려 각 제품군에 맞는 아톰 프로세서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6월 컴퓨텍스에서 공식적으로 실버몬트 마이크로아키텍처를 얹은 태블릿용 베이트레일 SoC 기반의 아톰 프로세서가 발표되면 이후 모바일이나 서버 같은 저전력 기반 제품 시장에서 ARM 계열 프로세서와 마주칠 수밖에 없어 저전력 프로세서 경쟁을 후끈 달아오르게 할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저전력 시장에서 아톰 프로세서의 인식이 아니라 이를 선택해 제품을 만드는 제조사의 전략적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는 문제다. 아톰과 ARM 사이의 갈등은 성능과 저전력 같은 문제 만이 아니라 제조 비용의 측면도 무시하긴 어렵기 때문이고, 결국 인텔과 ARM의 경쟁은 이제부터 볼만해질 것이라는 데 기대를 걸어도 좋다.
덧붙임 #
1. 인텔 프로세서는 마이크로아키텍처에 따라 개발 코드명을 가진 플랫폼이 나뉘고, 이 플랫폼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실제 판매되는 프로세서 이름이 된다.
2. 실버몬트를 기반으로 만들고 있는 저전력 프로세서 플랫폼은 태블릿용 배이트레일 외에도, 데이터센터용 아보톤, 네트워크 장비용 랭글리, 스마트폰용 메리필드 등으로 나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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