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특별한 패키지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인텔 펜티엄 20주년 기념판’. 그동안 자주 다루지 않았던 펜티엄이 세상 밖으로 나온지 20년이나 흘렀나 하는 놀라움과 한편으로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 제품치고는 초라한 패키지는 왠지 그 현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사실 펜티엄의 20주년 기념 제품이라고 하지만 실제 기념일은 이미 1년이나 지났다. 펜티엄이 첫 공개된 것은 1993년 3월이었으므로 지난 해 이미 만 스무살이 된 것이다. 때문에 1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20주년 기념판을 선보인 건 좀 의아한 부분이면서도 이제서야 지난 생일을 챙기니 좀 속상한 일이다. 그래도 이렇게 기념판이 나온 덕분에 한번쯤 펜티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이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중반 코어 프로세서의 등장으로 펜티엄은 중저가 시장을 오가는 프로세서로 그 위상을 낮췄야 했지만, 그 전까지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는 인텔을 대표하는 고성능 프로세서의 이름이었다. 펜티엄은 5를 뜻하는 그리스어 펜타(Penta)와 요소라는 의미의 라틴어 ium을 결합해 만든 브랜드. 80286과 80386, i486을 잇는 5번째 프로세서의 명칭으로 AMD나 싸이릭스 같은 호환 제품들과 차별성을 강화하기 위한 상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586이라는 숫자가 아닌 낯선 이름을 들고 나와 강력한 마케팅으로 밀어 부쳤다.
그렇다고 펜티엄이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큰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다. P5라는 코드명으로 불렀던 펜티엄은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2개의 파이프라인 구조를 가진 슈퍼스칼라 기술을 도입했고 64비트 외부 데이터 버스를 적용해 액세스 속도를 올렸으며 부동소수점 연산 능력이 좋아져 사이클당 연산 속도에선 확실히 i486을 제쳤다. 하지만 당시 대량 생산과 호환 제품이 넘친 덕분에 완전히 대중화된 i486을 단숨에 누를 만큼 주변 여건이 준비되지 않은 데다 몇 가지 악재도 겹쳤다.
맨 처음 상업용으로 선보인 펜티엄은 60MHz와 66MHz 두 가지로 각각 878달러와 964달러에 판매를 시작했다(그 이후에 나왔던 33MHz i486DX가 324달러, 40MHz i496DX2가 406달러였고, 비상업용 50MHz 펜티엄 엔지니어링 샘플도 존재했음). 확실히 펜티엄의 가격이 비쌌고 486에 비해 효율성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처음 나왔던 펜티엄들이 5V 이상의 전압으로 작동했던 탓에 소비 전력이 많고 발열로 인해 종종 깨지는 현상이 보고된다. 결국 이후 93년 10월 이후에 3.3V 전압을 낮추고 클럭을 높인 펜티엄들을 1세대 펜티엄을 대신하게 된다.
또한 인텔은 펜티엄을 발표한 지 1년 반 만에 한차례 모든 제품의 회수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 리콜의 원인은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대학교에서 발견된 부동소수점 나누셈 명령 버그(FDIV 버그). 부동소수점을 나누는 반복 연산의 경우 90억회에 1번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류다. 인텔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오류가 미치게 될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관련 오류를 낼 수 있는 모든 펜티엄 프로세서를 회수하기로 했다.
출시 초기 몇몇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 뒤로 펜티엄은 인텔의 꾸준한 마케팅에 힘입어 간판 CPU로 자리 매김한다. 비록 성능은 떨어지지만 초기 486 메인보드에서 작동하는 펜티엄 오버드라이브 같은 제품도 선보여 펜티엄 환경으로 이전하는 부담을 줄이기도 했고, 멀티미디어 성능을 강화하기 위한 MMX 명령어를 추가하는 등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화는 계속됐다(아마 펜티엄 MMX를 ‘연탄’이라는 애칭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초기 펜티엄이 상표로 자리 잡으면서 그 다음 세대는 한동안 새로운 이름을 짓지 않는다. 고성능 시장은 펜티엄, 중저가 시장엔 셀러론을 투입하면서 펜티엄 프로, 펜티엄2, 펜티엄 3, 펜티엄 4, 펜티엄 D 등 펜티엄의 후속 세대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하지만 진화의 한계에 부딪친 인텔이 2006년 새로운 마이크로아키텍처를 도입하고 ‘코어’ 상표를 내세운 마케팅을 시작한 이후 펜티엄의 위상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비록 코어와 같은 마이크로아키텍처를 도입한 펜티엄 프로세서도 함께 발표했음에도 새로운 코어 시리즈에 비해 오래된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텔은 펜티엄을 유지했다. 고가와 저가 사이의 애매했던 균형을 잡아주는 제품군으로써 펜티엄의 가치는 유효했다.
첫 공개될 당시 펜티엄은 310만 개의 트랜지스터와 60MHz의 클럭으로 작동했다. 공정은 0.8 미크론, 싱글코어에 모든 컨트롤러의 내장은 꿈꿀 수 없던 제품의 가격은 878달러였다. 지금 선보인 20주년 기념판 G3258의 트랜지스터는 14억개에 이른다. 클럭은 3.2GHz, 22나노미터 공정으로 제조되며, 듀얼 코어에 내장 그래픽과 각종 컨트롤러를 모두 담아낸 이 제품의 가격은 72달러다. 기술과 성능은 수십, 수백배로 발전했고 각종 비용은 반대로 줄어들었음을 이 프로세서의 역사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록 20년 동안 유일하게 이용해온 제품은 아닐지라도, 또는 과거처럼 주목 받는 제품은 아니라해도 지금까지 생존한 펜티엄은 ICT 세계에서 돌아볼만한 역사 그 자체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생존한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품만 담은 인텔 펜티엄 20주년 특별판은 역사를 되새겨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여지를 남기지 않은 너무 냉엄한 현실을 직접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완전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