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각으로 지난 8일 끝난 CES 2017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름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아마존을 댈 것이다. CES의 주요 전시관에서 아마존의 전시 부스도 없었고, 관련 업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마련했던 아리아 호텔의 대형 회의실과 알렉사 개발 관련 컨퍼런스가 두 개 정도 진행된 것에 비하면 너무 과한 평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CES 미디어 데이 첫날 열린 CES 언베일드(Unveiled)부터 드러난 아마존의 존재감은 CES 전시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존은 필요하면 직접 하드웨어를 만들지만, 이번 CES에서 새로운 하드웨어를 내놓은 것은 없다. 단지 다른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아마존의 서비스를 빌린 하드웨어를 내놓거나 접목하겠다고 이야기한 때문이다.
TV, 스피커, 자동차, 가전 제품, 로봇, 스마트폰…
아마존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태블릿 ‘킨들’과 스피커 ‘에코’, OTT 셋톱 ‘파이어TV’ 등을 출시해 왔다. 이 장치 이용자들은 리모컨과 음성 제어를 활용해 아마존의 주문형 도서와 음악, 영상 콘텐츠나 아마존에서 물품 구입 또는 스마트홈을 제어할 수 있었다. CES 2017에서 아마존 관련 제품도 기본적으로 아마존의 콘텐츠에 접근하고 각종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재주는 거의 같다. 하지만 아마존이 만들지 않는 장치, 아마존이 직접 접근하지 않는 제품이라는 점이 차이다. 유사 제품도 있지만, 아마존 서비스가 훨씬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_TV
맨 처음 본 것이 TV다. 아마존은 직접 TV를 만들지 않고 셋톱을 만들지만, 이를 TV에 넣은 제조사가 몇 있다. 그 중 하나다 CES 언베일드에 아마존 TV를 선보인 웨스트링일렉트로닉스(Westringelectronics)다. 이 회사의 웨스트링하우스 아마존 파이어 TV 에디션은 실시간 TV 채널과 아마존의 영화와 드라마, 앱 콘텐츠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는 63인치 4K TV다. 사실 파이어TV에 없는 실시간 채널까지 포함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일 뿐 알렉사 음성 비서까지 모두 활용할 수 있다. 가격은 1천 달러 안팎, 계열사인 세이키(Seiki)과 엘리먼트 일렉트로닉스(Element Electronic)도 비슷한 제품을 내놓는다.
_자동차
지난 해 CES에서 자동차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아마존의 인공지능 음성 비서 ‘알렉사’를 접목한다고 발표한 것은 포드였다. 올해도 포드는 IVI 시스템인 싱크(SYNC)와 알렉사와 연동된 시나리오를 좀더 넓혔다. 알렉사의 음성 비서를 활용해 싱크를 탑재한 차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가정내 다양한 설비를 제어할 수 있도록 연동 작업을 했다. 운전자가 알렉사를 부른 뒤 경기 결과를 묻거나 집에서 듣던 오디오북을 차에서 듣기도 하고, 가까운 커피숍을 찾아 지도에 띄울 수 있다. 집에 열어두고 나온 주차장 문을 닫도록 시키거나 현관등을 켜고 끄는 일도 한다. 오픈카 플랫폼인 INRIX도 아마존 알렉사를 도입해 아마존 음악와 오디오북, 교통 흐름, 주차, 사고 상황 등을 알리는 서비스를 내놨다.
알렉사를 접목한 포드에 이어 폭스바겐은 2013년부터 도입한 카넷(Car-Net)에 알렉사를 접목하기로 했다. 하지만 차 내의 음성 제어보다 집이나 사무실 등 외부에서 폭스바겐 차량에 실린 카넷을 제어하는 것에 가깝다. 이를 테면 연료 상태를 확인하거나 가까운 꽃집을 차에 있는 내비게이션에서 찾는 일 등이다. 폭스바겐은 CES 2017에서 관련 시나리오를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데모룸을 운영했다.
_가전 제품
아마존 에코는 단순한 지능형 스피커가 아니라 가정 내 장치를 제어하고 아마존의 상품을 주문할 수 있는 홈 허브 장치다. LG전자는 아마존 에코 같은 홈 허브 기능을 내장한 스마트 냉장고를 이번 CES에서 선보였다. 웹OS(WebOS) 기반 운영체제에서 작동하는 이 냉장고는 냉장고 문 위에 29인치 터치 디스플레이를 달아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아마존 에코와 마찬가지로 음성 비서인 알렉사를 불러 간단한 질문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요리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고, 아마존에서 음식 재료를 주문할 수도 있다.
홈허브 기능에 집중한 LG와 달리 월풀은 가전 제품에 아마존 에코와 연동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월풀 냉장고는 별도의 디스플레이가 없지만, 에코와 같은 홈 허브를 통해 냉장고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또한 세탁기와 건조기는 아마존 에코 장치를 통해 남은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오븐에서 요리할 때 버튼을 누르지 않고 조리 시간과 온도를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
아이케틀이라는 스마트 전기 주전자를 판매 중인 앱케틀(Appkettle)도 아마존 에코와 연동한다. 이 주전자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상황에 맞는 적정한 온도로 물을 데울 수 있는데, 알렉사와 연동해 물을 데우라고 시킬 수도 있고 주전자에 남아 있는 물의 양도 확인할 수 있다.
_스마트워치
미션은 아마존 알렉사를 통합한 스마트워치를 내놨다. 마션 엠보이스 스마트워치(mVoice Smartwatch)는 외부 버튼을 눌러 알렉사 기능을 실행할 수 있고 결과는 내장된 스피커로 출력한다. 하지만 스피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알렉사 앱으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용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으로 보이는 마션 엠보이스 스마트워치는 300달러다.
_스피커
아마존 에코와 같은 스피커형 장치도 몇몇 등장했다. 레노버는 아마존 에코와 거의 같은 크기의 스피커형 장치인 레노버 스마트 어시스턴트를 전시했다. 레노버 스마트 어시스턴트는 내부에 들어가는 하드웨어만 아마존 에코와 다를 뿐 원통형 생김새나 사용성은 거의 똑같다. 에코처럼 알렉사를 부르면 똑같이 작동하고 에코처럼 음악이나 다른 연동 장치를 제어할 수 있다. 아톰 X5 프로세서에 2GB의 램, 8GB의 저장 공간을 갖췄고, 하만 스피커 모듈을 내장한 것이 눈길을 끈다.
또 다른 회사인 오메이커는 포터블 스피커에 알렉사 보이스 서비스를 넣었는데, 무선 랜과 직접 연동해 음악을 스트리밍하는 장치여서 음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비스와 연동할 수 있다. 또한 오디오 단자와 SD카드, 마이크로 USB 등 여러 장치와 연동해 쓸 수도 있다.
_로봇
로봇과 아마존 음성 비서 알렉사의 결합이 이번 CES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물론 알렉사 같은 음성 비서를 활용하는 로봇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단지 알렉사 같은 지능형 음성 비서와 로봇의 만남은 다른 장치의 음성 비서 기능과 다르게 사람과 교감이 가능한 대화형 장치여서 로봇은 사람과 기계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CES에서 LG전자는 가정용 로봇 두 가지를 선보였다. 이 로봇의 기본 기능은 아마존 에코에 들어 있는 소프트웨어와 비슷하지만, 몇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에코보다 더 많은 성격을 표현할 수 있는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또한 에코는 움직일 수 없지만, LG 홈 로봇은 몸통을 돌리거나 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날씨 확인 외에도 LG 전자의 가전 장치를 제어하기도 하는 데 오븐을 예열하고 잔디 깎는 기계를 켜고 끄기도 한다.
유비테크도 아마존 음성 비서 알렉사를 링스(Lynx)라는 이름의 로봇에 넣었다. 링스는 일반적인 로봇처럼 팔과 다리를 모두 가진 로봇으로 춤을 추면서 날씨를 이야기하고 요가도 가르친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그에 따라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로봇이 갖고 있는 카메라로 애완동물을 지켜볼 수 있는 재주도 있다.
_스마트폰
아마존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파이어OS를 만든 뒤 이를 파이어폰이라는 스마트폰에 넣어 내놨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한 이후 태블릿만 집중했는데, 스마트폰을 직접 내지 않는 대신 알렉사를 통한 생태계 확장을 시도한다. 아마존과 손을 잡은 곳은 다름 아닌 화웨이다. 화웨이는 이번 CES 기조 연설에서 아마존 알렉사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인 메이트 9 프로에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메이트 9에서 아마존 알렉사를 탑재한 것을 두고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메이트 9 프로는 안드로이드 7.0 누가를 얹은 플래그십 스마트폰으로 이미 구글 음성 비서가 들어 있는데, 이를 아마존 알렉사로 대체하는 것이라서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준비하는 구글 입장에서 스마트폰 제조사가 다른 음성 비서를 채택하는 것은 충분히 신경쓰일 수 있는 일이어서 앞으로 다른 제조사의 움직임도 지켜봐야 할 일이 될 듯하다.
장치 생태계 넓힌 아마존, 하룻만에 쌓은 성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입장에서 위에 소개한 아마존 생태계 제품들은 그림의 떡이다. 아마존 관련 제품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제대로 구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어TV의 동영상은 아직 한국어 자막이나 한국어 인터페이스가 없고, 알렉사는 한국어를 알아듣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언젠가 알렉사가 한국어를 알아듣고 아마존이 한국어를 지원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사실 만으로 부정적이기도 하다. 아마존과 우리의 관계는 아직 먼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ES에 등장한 아마존 생태계 제품들의 다양성과 완성도, 증가 속도는 우리나라 관련 여부를 떠나 놀랍다. 이번 CES에서 처음 선보인 제품도 있고 지난 해에 발표했던 제품들도 이번 CES에서 또다시 공개한 것이더라도 가정과 자동차, 모바일 등 특정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아마존과 연결되고 있는 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이다. 그야말로 업계가 희망하는 모든 장치의 연결성을 현실로 이뤄내고 있다. 이제야 표준 통일을 알리고 있는 사물 인터넷 시장에서 알렉사는 한 발 앞서 나가는 인상이 강하다.
중요한 점은 CES에 아마존 생태계 제품이 모인 것은 다수 하루 아침에 쌓아 올린 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특히 음성 비서 알렉사를 위해 아마존은 2011년과 2012년에 음성인식 전문 업체 얍(YAP)과 시멘틱 검색엔진 기술 업체 에비(Evi)를 인수했고 글자를 읽어주는 TTS(Text to Speech) 업체 아이노바(INOVA)도 인수했다. 아마존은 이 기술을 모아 에코 스피커에 들어가는 아마존 보이스 서비스(Amazon Voice Service, AVS)를 완성했다.
AVS를 완성한 아마존은 곧바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API를 공개했다. 알렉사 스킬 키트(Alexa Skill Kit, ASK)라 부르는 이 API로 아마존이 아닌 다른 개발자들은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앱이나 장치를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이 API를 통해서 만들어진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을 스킬로 부르는 데, 이 스킬은 2016년 상반기 중 1천 개를 넘어선 상태다.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가 가입한 수많은 서비스나 ASK의 스킬을 가진 장치를 에코를 통해 음성으로 호출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개방 전략이 주효한 때문이다.
알렉사 스킬은 원래 아마존 에코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2016년 이전까지 하드웨어에서 알렉사를 쓰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 해 CES에서 포드 싱크를 시작으로 ‘알렉사-허용'(Alexa Enabled)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마존이 직접 내놓는 제품이 아니어도 알렉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지난 해 알렉사를 탑재한 제품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CES라는 한 자리에 모여 그 규모를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지능형 장치 생태계의 경쟁력을 드러낸 양상이다. 이는 곧 아마존의 지능형 음성 비서 ‘알렉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능형 장치 생태계의 확장과 인터넷과 연결되는 사물 인터넷 생태계 양쪽에서 적지 않은 경쟁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결과다. 단순히 아마존 제품이 늘어난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인터넷을 연결하는 지능형 브릿지라는 특수한 카테고리에서 아마존의 등장은 눈여겨 봐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아마존이 만들고 있는 이 생태계의 유일한 변수가 하나 있다면 아마존의 갑작스런 변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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