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쓰는 잉크젯 프린터들은 잉크를 분사하는 헤드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인쇄하는 방식을 써왔다. 헤드가 움직이면서 미세한 잉크 방울을 용지에 겹쳐 뿌리는 잉크젯 방식은 매우 오랫 동안 쓰인 기술로, 흑백 뿐만 아니라 고품질 컬러 인쇄 영역에서 놀라운 진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아무리 성능과 품질을 높여도 헤드의 이동 속도에 따른 성능 향상이 어려운 한계의 벽에 부딪쳤다. 프린터의 출력 속도를 높이면 상대적으로 인쇄 품질이 떨어지고, 인쇄 품질을 올리면 반대로 출력 속도가 떨어지고 출력비용이 오르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하지만 HP가 잉크젯 프린터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뻔한 이 한계를 돌파했다. 잉크를 분사하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더 빠르면서 초안 품질마저 좋은 잉크젯 프린터를 드디어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HP가 선택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종전 좌우로 움직이는 헤드를 없앴을 뿐이다. 여전히 잉크를 뿌리는 것은 똑같다. 좌우로 움직이는 헤드가 없는 잉크젯 프린터 기술, HP 페이지와이드 기술이 한계를 극복하는 열쇠였다.
그렇다면 페이지와이드 기술 프린터는 그 한계를 정말 깼을까? 실제로 출력을 했을 때 확인할 수 있던 것은 두 가지. 먼저 속도다. 종전 헤드를 이동하는 컬러 잉크젯 프린터가 1분당 찍을 수 있는 인쇄량은 컬러 A4 출력 기준 30장~35장 정도. 페이지와이드 기술 프린터는 이 속도를 최대 75장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프린터를 걸면 마치 인쇄를 하지 않은 빈 종이를 토해내듯 찍어낸다. 심지어 어지간한 컬러 레이저 프린터보다 인쇄 속도가 더 빠르다.
초당 인쇄량이 많으니 품질을 걱정할 법도 한데, 페이지와이드 프린터는 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표준 인쇄로 출력할 때 페이지와이드 기술 프린터는 고정된 헤드로 인쇄하는 터라 헤드를 움직여야 하는 방식으로 인쇄할 때 세밀함이 떨어지는 단점도 덮는다. 실제로 표준으로 출력한 문서를 보면 이것이 잉크젯 프린터의 출력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다. 레이저만큼 세밀하지는 않아도 헤드가 움직이면서 찍는 잉크젯의 출력물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잉크젯 프린터의 고질적 한계인 속도와 품질을 모두 잡은 HP 페이지와이드 기술은 어쩌면 매우 단순하다. 헤드가 움직이지 않는 대신 종이 크기만큼 가로로 길쭉한 프린트바에 헤드를 촘촘하게 배열했을 뿐이라서다. 그런데 이 방식을 처음 도입한 것은 우리 일상에서 쓰는 프린터가 아니라 HP 웹 프레스 같은 상업용 인쇄 장치였다. 소량이나 빠른 인쇄를 해야만 하는 상업용 디지털 컬러 인쇄물의 수요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개발한 기술로 고가의 상업 출력 시장을 겨냥한 제품부터 먼저 내놨다.
페이지와이드 기술을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쓰는 프린터 시장으로 가져온 것은 2013년이다. 당시 HP는 페이지와이드 기술을 넣은 오피스젯 프로 X라는 컬러 잉크젯 복합기와 프린터를 공개했지만, 그 제품들을 적극적으로 시장에 투입시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지 않았다. 그 구체적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두 개의 커다란 기업(HP, Inc와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으로 분리되는 혼란으로 인해 이 기술의 제품은 지난 3년 동안 거의 잊혀진 제품과 기술이 됐다.
그런데 지난 해 11월 기업 분사를 끝내고 새 출발한 HP.Inc(이하 HP)가 4월 6일 마카오 쉐라톤 호텔에서 HP 프린팅 재발명(Printing Reinvented)라는 슬로건을 걸고 아시아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발표 행사에서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던 페이지와이드 기술을 되살려냈다. 물론 3년 전 제품에 적용했던 기술만 꺼낸 것은 아니다. HP는 페이지와이드 프린팅을 새로운 프린팅 사업 전략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몇 년 전 HP가 페이지와이드 프린터를 내놓고도 특별한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던 것과 사뭇 다른 상황이다.
단지 앞서 나온 페이지와이드 프린터의 출력 속도와 품질, 서비스, 여기에 가격을 고려했을 때 종전 고급형 컬러 잉크젯 복합기와 중저가 컬러 레이저 프린터가 갖고 있던 시장에서 조금씩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페이지와이드 기술의 등장은 풍부한 컬러를 표현할 수 있는 잉크젯 방식과 빠른 속도를 가진 레이저 프린터의 장점을 모두 담아 결국 두 제품을 선택할 때 머뭇거리게 만들었던 단점이 사라졌다는 의미라서다.
HP는 두 제품 군이 이미 갖고 있던 영역을 일정부분 덜어내더라도 페이지와이드 기술 프린터를 이제 잉크젯과 레이저 프린터와 또 다른 하나의 제품 카테고리로 완전히 인정한 뒤 이용자의 선택권을 넓혀 가는 길을 찾기로 했다. 이것 역시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의 제품이고 그동안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공급하는 HP 전략에도 부합해서다. 코콩멍 HP SEAST-K 전무 이사는 한국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은 잉크젯, 레이저, 페이지와이드 등 특정 종류를 원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요구에 맞는 제품을 원하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킨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제품을 내놓는 것 뿐”이라고 설명하고 시장 잠식보다 새로운 시장 확대를 위한 도전으로 봐야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실제로 HP는 이날 발표한 6개 제품 외에도 더 많은 페이지와이드 기술 제품을 올해 꾸준히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페이지와이드 기술이 종이에 인쇄하는 오늘 날의 출력물이 아니라 미래의 HP 프린팅과 연관된 기술이라는 점이다. 올해 발표한 페이지와이드 기술 프린터는 모두 A4 크기만 인쇄할 수 있지만, HP는 프린팅 리인벤트 키노트에서 내년 A3 크기 프린터로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올해 말 출시할 상업용 3D 프린터도 HP 페이지와이드 프린팅 기술을 이용하는데, 현재보다 미래의 HP의 제품 카테고리를 넓힐 기술인 것은 분명하다. HP의 3D 프린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삼가지만 한가지 공통적인 메시지는 있다. 그 중심에 페이지와이드 기술이 있고, 이것이 HP 프린팅 리인벤트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임 #
이 글은 테크G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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