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년 전, 나는 마카오에서 HP의 새로운 혁신들을 만나고 있었다. 꾸준히 떠오르는 모바일에 비해 조금씩 가라 앉고 있던 PC 시장에 대한 암울한 소식이 그득했던 그 때, HP는 오히려 변화된 시장에 걸맞게 변화한 제품을 들고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AAA 건전지보다 얇았던 HP 스펙터, 가장 가벼운 노트북 엘리트북 폴리오는 30~40대 밀레니얼 세대가 하나의 제품으로 어디에서나 업무와 엔터테인먼트를 모두 즐기는 ‘원라이프'(One Life)를 위한 제품을 내놓겠다는 약속의 테이프를 끊는데 어울리는 제품이었다. 해마다 수억 대의 PC를 팔았던 시대의 끝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다른 PC 제조사보다 빠르게 고급화 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런데 HP는 노트북의 혁신에서 행동을 멈추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책상 위에 올려 둔, 또는 책상 아래에 놓아둔 데스크톱 PC에 꽂혀 있었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무렵 새로운 해답을 가진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생산하기 쉬우나 투박하고 값싸게 팔았던 데스크톱 PC가 아니라 책상을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데스크톱 PC. 엘리트 슬라이스는 HP의 새로운 해답 가운데 하나다.
HP 엘리트 슬라이스가 여느 PC와 다른 점은 패키지를 여는 순간 알게 된다. 보통 큼지막한 PC가 들어 있을 거라 짐작되는 공간에 둥근 모서리를 가진 4개의 작은 사면체가 들어 있어서다. 처음은 어리 둥절하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HP 엘리트 슬라이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왜냐면 HP 엘리트 슬라이스는 모듈 PC이기 때문이다.
물론 4개의 모듈 중 HP 엘리트 슬라이스의 본체는 하나다. 다른 PC와 마찬 가지로 본체엔 프로세서, 램, 저장장치, 그래픽 칩셋 등 PC의 모든 부품이 들어 있다. 사실 본체 부문만 모니터와 전원을 연결해도 HP 슬라이스는 잘 작동한다. 단지 본체에 없는 게 다른 모듈에 있다. 스피커, 광학 드라이브와 모니터 뒤에 붙이거나 벽걸이로 쓸 때 필요한 베사 플레이트(VESA Plate)다. 쓰임새에 따라 모듈은 붙이고 뗄 수 있다.
모듈을 조합할 때는 본체를 모듈 위에 올리는 구조다. 쉽게 층층이 다른 음식을 담을 수 있는 4단 도시락 통을 생각하면 된다. 때문에 엘리트 슬라이스 본체와 모듈의 기본 모양과 너비는 똑같다. 단지 본체의 키가 다른 모듈보다 좀더 크다. 본체를 위에 올리는 것은 발열 관리와 기능성 때문으로 보인다. PC 내부의 열을 본체 위쪽으로 열을 빼내는 구조인데다 본체 상판이 무선 충전 패드를 겸하고 있다. 더구나 본체 위로 모듈을 올리는 것이 훨씬 깔끔한 구조다.
본체와 모듈, 모듈과 모듈 연결은 쉽다. 모듈 위에 본체나 다른 모듈을 올린 다음 살짝 눌러 주면 그만이다. 각 모듈의 바닥과 상판에 있는 USB 타입 C 단자끼리 맞물리게 올려 놓기만 하면 말이다. 물론 연결된 모듈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걸쇠로 꽉 잡아준다. 모듈을 분리할 땐 이 걸쇠를 풀어주는 잠금 버튼을 눌러야 한다. 다만 핫스왑은 지원하지 않으므로 전원을 켠 상태에서 분리하거나 붙이면 재 부팅할 때까지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
다만 모듈을 연결할 때 순서는 있다. 본체는 무조건 맨 위, 광학 드라이브가 중간, 스피커는 맨 아래다. 베사 플레이트도 맨 아래 모듈이지만 책상 위에 놓고 쓸 땐 받침대 이상의 기능은 없다. 본체를 맨 위에 올리는 것과 반대로 스피커 모듈은 중간에 넣을 수 없다. 스피커 위에 모듈을 올릴 수 있는 USB 커넥터만 있을 뿐, 스피커 아래에 모듈을 연결할 수 있는 USB 커넥터가 없다. 때문에 스피커는 맨 아래 위치다. 광학 드라이브는 광학 드라이브는 상판과 바닥에 모두 USB 커넥트가 있어 본체와 스피커 사이에 넣거나 스피커 연결 없이 쓸 수 있다. USB 커넥터로 쉽게 붙였다 뗄 수는 있지만, 이 모듈은 핫스왑 기능이 없어 전원을 켠 상태에서 결합하거나 분리하면 시스템 자체를 재시작해야만 모듈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모듈을 연결하기 전 엘리트 슬라이스 본체만 보면 영락없는 미니 PC다. 짙은 어둠이 내려 앉은 듯한 무광 검정의 옷을 입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인공 조명에 은은하게 반사할 때 드러나는 만듦새는 그럴 듯하다. 네 귀퉁이를 둥글게 다듬은 데다 중요한 단자를 본체 뒤쪽으로 옮겨 군더더기 없고 마감도 좋다. 전원을 넣었을 때 본체 상판 앞쪽에 나타나는 5개의 LED 터치 버튼의 불빛도 과하지 않다.
미니 PC라도 외부 연결에 필요한 단자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담았다. 모니터 출력을 위한 HDMI와 디스플레이 포트, USB 타입 A와 USB 타입 C 각 2개, 유선 랜 단까지 갖췄다. 무선 랜도 내장하고 있는 터라 무선 공유기만 있다면 굳이 랜선을 끌어다 꽂지 않아도 인터넷이나 내부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
엘리트 슬라이스의 본체에서 흥미로운 게 하나 있다. 본체 오른쪽에 지문 센서를 달았다는 점이다. 요즘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서 지문 센서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미니 PC에 붙인 지문 센서는 신선하다. 물론 이 지문 센서로 윈도를 시작할 때, 또는 앱스토어에서 앱을 구매할 때 비밀 번호나 핀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로그인을 할 수 있다. HP 시큐리티 매니저나 윈도 헬로 설정에서 지문을 등록하는 과정을 거친 뒤 엘리트 슬라이스를 켤 때 지문 센서에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바탕 화면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사실 엘리트 슬라이스에 전원을 넣은 이후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뜬 잠금 화면을 봤을 때 걱정한 부분은 발열에 의한 소음이다. 미니 PC의 구조상 큰 팬을 쓰지 못하는 데다, 미니 PC라서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두고 쓸 것이기에 내부 열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팬 소음이 사용성에 방해될까봐 조금 걱정했던 것이다. HP 엘리트 슬라이스는 2.7GHz 인텔 6세대 코어 i5-6600가 계산하면서 내는 열을 식히기 위해 팬을 돌리는데, 프로세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에 따라 팬의 회전에 따른 소음이 달라진다.
다만 문서 작업을 하거나 영화 한편 보는 정도에서 들리는 소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프로세서 사용량이 30% 이하로 유지되면 지금 HP 엘리트 슬라이스를 켜 놓은 상태인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물론 3D 게임처럼 프로세서 사용량을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무거운 작업을 할 때면 바람 새는 소리가 좀더 크게 들리긴 해도 굳이 업무용으로만 쓴다면 소음 때문에 짜증 레벨이 오르는 경험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6세대 인텔 코어 i5-6600의 내장 그래픽 ‘HD 그래픽스 530’의 능력이 <히어로즈 오브 스톰> 정도면 몰라도 <포르자 모터 스포츠 : 에이펙스> 같은 3D 게임을 최저 해상도와 최저 옵션으로 즐길 수 있는 정도이기에 게이밍에 대한 마음만 접으면 이 PC는 편안하게 쓸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정숙한 HP 엘리트 슬라이스는 기본적인 초점을 업무용에 맞춰 소프트웨어를 담고 있다. 64비트 윈도 10 프로를 운영체제로 쓰면서도 기본 운영체제에 없는 보안과 업무용 툴을 발견할 수 있다. HP 엘리트 슬라이스의 클라이언트 시큐리티 매니저는 시스템의 비밀 번호와 지문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누군가 플래시 메모리를 꽂고 함부로 데이터를 꺼내갈 수 없게 장치를 제어한다. 이 규칙들은 한편으로 엄격하게 느낄 수 있지만, 보안을 목숨처럼 취급하는 곳에선 매우 유용한 부분이다.
내장된 인텔 유나이트나 기업용 스카이프 같은 도구들도 업무에 도움을 준다. 인텔 유나이트는 굳이 회의실에 모이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동일한 회의 자료를 공유하며 회의할 수 있는 도구다. 몇 가지 설정을 한 뒤 유나이트 모드로 시스템을 시작하면 앉은 자리에서 회의 자료를 공유받을 수 있으므로 편하다. 물론 HP 엘리트 슬라이스 같은 인텔 프로세서가 작동하는 PC만 쓸 수 있는 재주다.
여기에 기업용 스카이프 같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쓸 수 있게 마이크도 내장했다. 내장 마이크로 음성 입력, 스피커 모듈로 소리를 출력하면 엘리트 슬라이그가 회의용 스피커폰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스카이프를 활용한 인터넷 음성 통화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외부 잡음을 줄이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섞었는데, 일정한 주파수의 잡음을 뺀 음성만 전달된다. 실제 모니터 옆에 있던 HP 엘리트 슬라이스에서 50cm 정도 떨어져 앉아 녹음한 뒤 소리를 들었을 때 제법 목소리가 명쾌하게 들릴 정도로 마이크 감도는 괜찮았다. 굳이 고감도 마이크를 따로 쓸 필요는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보안과 생산성 도구를 챙겨 넣은 이후 128GB SSD의 남은 저장 용량은 95GB 남짓. 문서 작업만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만으로도 문제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무거운 작업을 하려는 이들에게 넉넉하진 않다. 복구를 위한 파티션은 겨우 1GB 정도에 불과하나 동영상이나 그밖의 데이터를 많이 쌓아놓는 이들에게 좀더 많은 저장공간을 권하고 싶다. 이미 HP는 m.2 방식의 128GB SSD 모델 외에 128GB SSD와 1TB 하드디스크를 본체에 내장한 모델도 준비해 뒀다.
사실 이 부분에서 아쉽다. HP 엘리트 슬라이스는 저장 공간을 쉽게 확장할 수 없는 일체형 구조여서 처음부터 대용량 저장 공간을 탑재한 제품을 고르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공간이 꽉 찼을 때 백업을 하거나 USB 메모리를 쓰는 것 외에 확장 방법이 마땅치 않다. USB 타입 C로 연결되는 모듈인만큼 대용량 하드디스크 모듈이라도 있었으면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텐데 관련 모듈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아직 다른 모듈을 만들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니 저장 장치 모듈이 나오기를 바라는 때를 기다려 봐야 할 듯하다.
광학 드라이브 모듈은 얇게 만들다보니 일반적인 PC 드라이브보다 노트북용 드라이브에 더 가깝다. 버튼을 누르면 드라이브가 스르르 열리는 게 아니라 툭 튀어나온다. 드라이브를 열고 닫는 모터를 담기 힘든 슬림구조여서 어쩔 수 없나 싶지만, 차라리 슬라이드 로딩 구조였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기능적으로 전혀 문제는 없다.
광학 드라이브는 정말 필요에 따라 붙이거나 뺄 수 있어도 스피커 모듈은 꼭 붙여서 쓸 수밖에 없다. 굳이 다른 스피커를 붙일 필요 없이 이 모듈을 붙이기만 해도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뱅앤울룹슨이라는 로고가 너무 선명한 것도 적지 않은 이유다. HP 엘리트 슬라이스에 꼭 맞는 전용 스피커 모듈이라 만듦새도 돋보이는데다 뱅앤울룹슨ㅇ라는 로고 장식도 멋을 더한다. 뱅앤울룹슨 모듈을 붙이면 오디오 컨트롤 프로그램을 통해 콘텐츠에 맞춰 이퀄라이저를 설정할 수 있다. 다만 얇은 모듈의 특성상 시원한 고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피커 모듈의 저음 표현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HP 엘리트 슬라이스의 모듈형 PC 컨셉트와 본체, 모듈의 수준 높은 만듦새에 딱 하나 어울리지 않는 옥의 티가 하나 있다. 키보드다. 사실 HP는 펜타그래프 방식의 노트북용 키보드를 잘 만드는 편이지만, HP 엘리트 슬라이스의 키보드는 작동 방식보다 배열에서 문제를 느낀다. 키패드까지 갖춘 넓은 키보드임에도 편하지 않은 이유는 <엔터>키가 상대적으로 작고 자판과 키패드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다보니 <엔터>키만 바로 찾아서 누르는 작업을 할 때 살짝 불편하다.
키보드에서 살짝 맛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단조로운 데스크톱 PC에 비하면 HP 엘리트 슬라이스는 꽤 맛있게 느낄 만한 제품이다. 모듈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미니 PC의 기능을 확장하는 컨셉트도 그렇거니와 만듦새, 소음, 보안과 업무를 위한 소프트웨어까지 제품이 쓰일 환경을 잘 해석해 구성한 느낌이다. 물론 모듈의 다양성 부족, 명확하지 않은 키보드 배열 등 몇 가지 숙제를 남겼어도 이처럼 재미를 주는 데스크톱은 드물다. PC의 혁신을 멈추지 않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HP에게 엘리트 슬라이스는 HP PC 역사에서 하나의 인생작 같은 제품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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