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 현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1년 동안 윈도보다 더 열심히 홍보해 온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합 현실을 알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방식은 조금 미묘했다. 미디어 브리핑이나 컴퓨텍스 같은 전시 행사의 기조 연설 같은 대부분 기회를 잡았음에도 혼합 현실(Mixed Reality)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설명하면서 설득과 동의를 구하려는 듯한 인상이 강했을 뿐, 대중적인 공개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이거 보고 싶지?’, ‘이러면 안 쓸 수 없을걸?’ 같은 뉘앙스로 혼합 현실을 더 가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처럼 모호한 행보를 해오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다른 모습을 IFA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이전까지 개발자나 업계 관계자들에게 개방했던 거의 모든 혼합 현실 장치를 일반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연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물론 IFA를 찾은 레노버, 델, 에이수스, 에이서 등 혼합 현실 장치 업체들의 제품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동시에 열린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가 지금에 와서야 이 제품들을 공개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10월 17일, 새로운 윈도가 열리는 날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마이크로소프트가 9월 1일 IFA 키노트에서 했던 말은 그 이전에 했던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준비해 온 윈도 10의 4번째 메이저 업데이트, ‘가을 크리에이트 업데이트'(Fall Creator Update)의 출시일을 처음 공개한 것이다. 10월 17일. 키노트를 했던 날로부터 약 한 달 보름 뒤에 이 업데이트가 진행되며, 같은 날부터 혼합 현실 장치도 일반 판매를 시작한다.
이 윈도 10 가을 크리에이터 업데이트가 이전의 윈도 10보다 더 눈길을 끄는 이유는 윈도 홀로그래픽 컴퓨팅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PC 운영체제의 기본 골격은 변함 없지만, PC 기반의 증강 현실이나 혼합 현실을 갖고 있다면 별도의 윈도 인터페이스에서 다룰 수 있으므로 기존과 다른 방법으로 PC를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혼합 현실을 위한 메이저 업데이트를 앞둔 상태에서 가장 가까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행사가 바로 IFA였다.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와 PC 제조사들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발표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디자인과 가격, 그리고 번들… 혼합 현실 장치의 구매 조건
IFA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혼합 현실 장치는 HP와 에이수스를 제외한 3가지다. 미디어 행사를 통해서 등록된 참관자들에게만 제품 체험을 진행한 에이수스를 예외로 치면, 델과 레노버, 에이서의 제품을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혼합 현실 장치를 모두 경험한 이들은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하는지 기준이 명확해 진다. 서로 다른 모양새를 지녔지만, 실제 경험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온 혼합 현실 장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레퍼런스 설계에 따라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두 개의 외부 카메라로 컨트롤러와 손을 추적하고 동일한 해상도(1440×1440)의 디스플레이를 쓰는 부품 설계, 쉬운 탈착식 구조 등 MR 하드웨어는 모두 동일하다.
때문에 혼합 현실을 선택할 때 조건은 하드웨어의 성능보다 만듦새와 가격, 그리고 컨트롤러나 콘텐츠 같은 번들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드웨어의 성능 차이가 눈에 보일 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그 외적인 요소에 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가상 현실의 대중화와 가상 현실 장치의 가격 제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실제와 가상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혼합 현실 장치를 만들었지만, 사실 마이크로소프트의 혼합 현실은 좀더 쉽게 접근 가능한 가상 현실 장치에 가깝다. 오큘러스 리프트나 HTC 바이브보다 적은 주변 장치로 인해 연결하기 쉽고 윈도 홀로그래픽용으로 만든 윈도 유니버설 앱을 더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실제 세계와 겹치지 않는 시각 현실이라는 점에서는 가상 현실과 거의 같다.
하지만 혼합 현실이 가상 현실과 유사성을 지녔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가진 의미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가상 현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수 있다. 보급형 혼합 현실 제품은 299달러(컨트롤로는 제외)에 출시되는 데, 이는 본제 가격만 399달러인 오큘러스 리프트보다 100달러 더 싸다. 오큘러스 측이 선제 대응 차원에서 컨트롤러 포함 399달러로 판매하는 행사를 진행 중인데, 아마도 당분간 이 가격을 높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고 종전 가상 현실 시스템들이 기술적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혼합 현실 장치들은 외부 컨트롤러와 손을 인지하기 위한 카메라를 헤드셋에 넣었기 때문에 외부 공간의 범위를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컨트롤러의 정확성에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면 가상 현실 시스템은 외부 센서를 통해 공간을 탐색하고 컨트롤러를 추적하는 만큼 좀더 정확한 추적을 할 수 있다. 혼합 현실 장치와 기존 가상 현실 장치는 분명한 일장일단을 갖는다.
시각 현실 플랫폼으로써 확장되는 윈도 10
혼합 현실 장치의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의미 있는 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역시 마이크로소프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을 별도의 운영체제에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윈도 10 기반의 운영체제를 그대로 살려서 활용한다. 즉, 데스크톱 운영체제였던 윈도 10이 시각 현실 분야까지 확장되는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컨트롤러를 뺀 혼합 현실 하드웨어는 만들지 않는 대신 각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신경써야 할 소프트웨어 부문의 플랫폼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는 PC 제조사와 운영체제 제조사가 역할을 나눠왔던 종전 PC 생태계와 똑같이 접근한다는 이야기다. 단지 데스크톱 화면을 대신해 조작할 수 있는 전용 홈 인터페이스를 모든 혼합 현실 장치에 제공하는 한편, 기존 윈도 10의 유니버설 앱을 개발, 유통, 설치 등을 혼합 현실에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이것은 혼합 현실의 호환성을 강화하고 누구나 다른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전용 홈 인터페이스는 마치 가상 공간 안에 꾸며 놓은 집과 같은 구조여서 리모컨으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고, 각 방에 배치해 놓은 기능이나 설치된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시어터 전용관을 통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이 조작 방법과 공간에 익숙해 지면 모든 제조사에 상관 없이 윈도 PC처럼 다룰 수 있는 것처럼 혼합 현실 장치를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마이크로소프트의 혼합 현실은 시각 현실을 위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고, 이번 IFA에서 대중화를 위한 출발선 위에 서 있음을 알렸다. 그동안 복잡하고 비싸고 어렵다는 시각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뚫기 위한 노력들이 이제 어떻 반응으로 나타날지 지켜볼 차례다.
우리나라도 혼합 현실은 들어올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피스 프로의 국내 소개 행사에서 만나 혼합 현실의 한국 도입을 긍정적으로 추진 중이라고 밝힌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의 홍보 담당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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