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PC 분야는 혼자 낄낄 거리기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내뿜는다. 특히 인텔과 엔비디아, AMD의 삼각 관계는 경쟁과 협업을 통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최고의 구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토론의 장을 여는 데 적절한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삼각 관계 사이에 재미있는 소식이 나왔다. AMD가 인텔을 위한 커스텀 GPU를 만들기로 했고, 인텔은 이 GPU를 CPU 가까이 패키징 할 수 있는 연결 기술을 공개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상상했던, AMD나 엔비디아 그래픽 프로세서를 탑재한 인텔 프로세서를 실제로 보게 될 날이 오는 것이다.
이번 협력을 두고 인텔이 그래픽 분야에서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를 견제하기 위해 AMD와 손을 맞잡은 것이라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아마도 최근 인공 지능과 관련해 엔비디아만 독주하는 듯한 인상이어서 그런 착시를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텔이나 AMD를 옹졸하게 평가하는 결론으로는 이번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보다 인텔 GPU 전략과 PC 폼팩터의 진화를 좀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인텔 입장에서는 엔비디아도 필요하고 AMD도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인텔은 이미 엔비디아의 GPU 기술 특허를 활용해 내장 그래픽 기술을 개발해 왔다. 인텔과 엔비디아는 2011년 3월 교차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상호 특허 기술의 이용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 계약은 당시 인텔과 엔비디아 사이에 벌어진 각종 소송을 취하하기 위한 합의를 포함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인텔로부터 5년 동안 모두 15억 달러를 받는 동시에 인텔에서 제기했던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을 받아들였고, 인텔은 특허를 가진 엔비디아의 GPU 지적 재산을 이용하는 조건으로 맺었던 계약이었다.
2017년 3월에 만료 예정이던 인텔과 엔비디아의 교차 라이센스 계약으로 인해 2016년부터 인텔과 엔비디아의 계약 연장 뿐만 아니라 AMD와 라이센스 합의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당시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기술 라이센스 측면만 보면 당시 소문을 부인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번에 발표한 AMD와 인텔의 기술 협력은 상호 기술에 대한 면허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AMD가 인텔 프로세서를 위한 커스텀 GPU를 공급하고 인텔은 이 GPU를 하나의 패키지에 싣는 기술을 따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AMD와 GPU 기술을 교환하는 계약을 맺었다면 인텔은 그 기술을 내장 GPU의 개발을 위해 쓸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발표에서 인텔은 이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AMD도 인텔 프로세서에서 쓸 수 있는 GPU를 개발하는 것일 뿐, 기술을 공유하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텔은 계속 별도의 내장 그래픽을 개발하고 AMD는 독립형 그래픽 칩셋의 공급사로써 협력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번 기술 협력이 단순히 부품 공급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PC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인텔이 올해 초 발표했던 EMIB(Embedded Multi-Die Interconnect Bridge)는 CPU, GPU, 메인보드 칩셋 및 메모리 등 각기 다른 구조의 PC 구성 요소들을 프로세서 크기에 담았을 때 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술이다. 각 칩셋은 CPU에 내장되는 게 아니라 프로세서 패키지 위에 별도 모듈처럼 배치되지만, EMIB를 통해 이종 칩셋을 연결함으로써 데이터의 물리적인 전송 거리를 좁히고 시스템의 크기와 소모되는 전력을 줄이는 여러 장점이 있다.
이는 오래된 PC 구조를 바꾸는 중대한 기술적 변화의 시작이다. 이전까지 인텔은 한정된 공간을 나눠 CPU와 GPU를 비롯해 각종 컨트롤러를 내장하는 방식으로 프로세서를 개발했지만, 이번에는 CPU는 CPU대로, GPU는 GPU대로 개발한 뒤 이를 작은 패키지에서 결합하는 방식이다. 물론 종전대로 CPU를 개발하면 단일 공정으로 생산하고 처리 효율성과 전력 효율성을 높일 수 있으나 통합 개발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고 내장 GPU의 모자란 성능에 대한 불만은 외장 GPU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결국 메인보드의 크기를 줄이지 못한다.
EMIB를 활용하면 결과적으로 제한된 CPU 안에 인위적으로 그래픽 코어를 집적하는 것과 다르게 더 성능이 좋은 독립형 외장 GPU를 패키징한 프로세서를 내놓을 수 있다. 그러니까 CPU와 GPU 모듈은 분리된 형태로 하나의 프로세서에 담을 수 있고 메인보드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메인보드 크기가 줄어들면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줄 수 있고 AR 헤드셋이나 폴더블 디바이스 같은 새로운 폼팩터에 도전할 수 있다. 물론 인텔은 일단 고성능 노트북 시장의 대체제로 먼저 접근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문제는 EMIB의 요구 사항에 맞는 GPU를 따로 공급해야 하는 점이다. 프로세서 패키지에 실을 수 있고 EMIB와 호환되는 GPU가 필요하다. 이에 AMD가 먼저 화답한 셈이다. 인텔에게 GPU 기술을 내줄 걱정 없이 고성능 GPU만 공급함으로써 인텔 CPU와 AMD GPU가 결합된 고성능 인텔 프로세서를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텔은 분리형 AMD GPU를 결합한 8세대 인텔 코어-H 프로세서를 2018년에 내놓을 계획이다. 단지 8세대 인텔 코어-H 프로세서의 GPU 성능은 알려진바 없고 이것의 동작 여부도 확인된 게 없지만, 인텔의 GPU 개발 전략의 변경도 알려진 게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AMD에게 분리형 GPU를 공급받기로 한 인텔은 앞으로 내장형 그래픽을 어찌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인텔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내장형 그래픽의 개발을 포기할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고성능 프로세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발할 수 있지만, 그보다 하위 모델은 기존 GPU를 통합한 CPU를 그대로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인텔이 내장형 그래픽을 계속 개발하려면 종전 엔비디아 그래픽 기술에 대한 지적 자산을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 하지만 지난 3월을 끝으로 인텔과 엔비디아의 지적 재산과 관련된 계약 소식은 지금까지 들리지 않는다. 2011년에 맺었던 것 같은 교차 계약은 이제 무의미한 상황이 되기는 했어도 인텔에게 아직 엔비디아의 그래픽 관련 특허가 필요하기 때문에 연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에 그친 것이다.
그러면 AMD가 대신 그래픽 관련 지적 자산을 공유해주는 계약을 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AMD는 이번 협력에서 그래픽 특허를 공유하는 계약을 맺지 않았다. 즉, 인텔은 AMD의 그래픽 기술을 가져가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AMD의 그래픽 특허를 활용한 인텔 내장형 그래픽은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이 계약은 공유할 그래픽 특허가 적은 인텔로부터 가져올 게 없는 AMD가 거절했거나 다른 이유로 인텔이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자의 가정보다 후자의 가정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인텔이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아도 되는, 뭔가 믿는 게 있다는 이야기다.
내장형 그래픽을 계속 진화시켜야 하는 인텔에게 엔비디아나 AMD의 그래픽 기술 특허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만약 한 곳의 특허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단서를 인텔과 엔비디아의 2011년 교차 라이센스 계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계약서는 아래와 계약 만료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The term of the patent cross license agreement continues until the expiration of the last to expire of the licensed patents, unless earlier terminated. NVIDIA may terminate the patent cross license agreement if Intel fails to make the required payments under the patent cross license agreement and fails to cure such non-payment within 60 days. In addition, the patent cross license agreement may be terminated in whole or in part under certain circumstances with respect to a party, if such party declares bankruptcy or undergoes a change of control.”
이 계약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텔은 명시한 금액을 기간 내 지불하지 못해 이 계약을 조기에 종료하거나 파산 또는 도산 같은 특허 대상의 상황이 바뀌는 경우를 제외하고 엔비디아의 특허가 만료되는 시한까지 계속 유지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텔과 엔비디아의 실제 계약은 5년이지만, 이 기간 동안 인텔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엔비디아의 그래픽 지적 자산들은 각 특허의 만료일까지 인텔이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특허는 20년 동안 보호를 받으므로 2017년 3월에 취득한 특허는 20년 뒤인 2037년까지 계속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허 만료 이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텔과 계약을 맺었던 지난 5년 사이 엔비디아의 그래픽 기술이 상당히 진전됐고, 오늘날 놀라운 그래픽을 보여주는 기술 특허가 상당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성과를 냈던 엔비디아의 9세대와 10세대 GPU가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을 감안할 때 인텔은 엔비디아의 거의 모든 주요 기술 특허에 접근할 수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인텔은 당장 추가 계약을 맺지 않아도 지난 계약의 유효성에 따라 새로운 계약 연장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엔비디아나 AMD의 그래픽 기술을 이용하는 계약을 언제까지 미룰 지 알 수는 없지만, 기술 공유 계약이 만료된 다급한 상황에서도 인텔이 이처럼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당분간 엔비디아의 그래픽 지적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유효한 계약이 남아 있는 인텔에게 급할 게 없는 것이다. 물론 엔비디아 입장에서 보면 전체 매출 가운데 지적 자산의 공유로 벌어들이던 16% 중 상당 부분이 증발해 버려 골치 좀 아플 듯하다. 그래도 엔비디아와 AMD의 그래픽 지적 자산과 제품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흡수하고 통합해 인텔의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전략에 성공한 인텔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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