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의 프레스 데이는 대부분 개막 하루 전에 열리지만, 올해는 하루에 몰려 있는 혼잡한 프레스 데이 일정을 피해 이틀 전 진행한 곳이 있다. 중국 제조사 TCL이다. TCL은 옛 MWC 전시장이었던 피라 몬주익(Fira Monjuic) 인근에 있는 돔으로 된 작은 공간을 빌렸고 25일 저녁 7시(바르셀로나 현지 시각) 에 MWC 프레스 데이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런데 TCL의 이번 행사를 주목하는 배경은 지난 해와 조금 다르다. 지난 해까지 중저가 스마트폰 브랜드 ‘알카텔'(Alcatel)의 소유주였던 TCL이었지만, 올해는 전혀 다른 이름 값의 제품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지난 해 말 브랜드 사용권을 확보한 블랙베리를 이날 행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TCL은 블랙베리의 하드웨어 제조사였던 터라 다른 누구보다 블랙베리의 특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유산을 물려받을 적임자로 볼만한 곳이다. 다만 블랙베리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락가락 전략을 편 탓에 위탁 생산자의 꼬리표를 달고 DTEK 같은 변종 전략으로 시장을 탐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MWC2017에서 TCL은 블랙베리의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블랙베리 사용권을 확보한 입장에서 애매한 입장보다 TCL의 브랜드 전략에 들어 있음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TCL 커뮤니케이션 CEO 니콜라스 지벨(Nicolas Zibell)은 종전 중저가 시장을 공략하던 알카텔과 아울러 블랙베리로 플래그십 시장에 뛰어 드는 두 개의 브랜딩 전략 운영에 대해 밝혔다. DTEK 같은 어중간한 전략이 아니라 ‘블랙베리'(BlackBerry)의 브랜드를 더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TCL의 이름으로 선보이는 첫 블랙베리 ‘블랙베리 키원'(BlackBerry KEYone)을 이날 발표한 것이다.
사실 이 행사에 들어서기에 앞서 블랙베리의 유작으로 불리는 블랙베리 머큐리(BlackBerry Mercury)의 등장은 어느 정도 예상된 그림이었다. 하지만 TCL은 블랙베리 머큐리라는 이름 대신 블랙베리 키원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했다. 다음 제품이 블랙베리 키투가 될지는 몰라도 블랙베리 아래서 개발된 제품을 TCL을 통해 선보이는 마지막이자 첫 열쇠가 되는 제품인 것은 틀림 없다.
일단 블랙베리 키원은 한 눈에 봐도 이것이 블랙베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특징을 드러낸다. 화면 아래에 물리 키보드를 붙여 놓은 때문이다. 화면 부분을 위로 올리면 감춰뒀던 키보드가 나타나는 블랙베리 프리브와 달리, 곧바로 키보드를 드러낸 것은 블랙베리라면 당연한 듯하지만, 화면만 보이는 요즘 스마트폰 사이에 놓고 보면 과감한 노출인 셈이다.
그렇다고 키보드가 과거의 블랙베리의 이름 값에 어울린다는 칭찬까지 불러내기는 조금 어려울 듯하다. 자판의 구성이야 이전하고 크게 변한 것은 없으나 형태나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바람에 쓸려 온 모래가 쌓여서 만든 모래 언덕 같은 생김새의 자판이 아니라 거의 모양 없는 밋밋한 형태인 데다 ‘쫀득’하게 들러붙던 블랙베리 볼드 시절과 다른 가벼운 눌림이 왠지 어색하다. 아마도 TCL이나 블랙베리는 오래 된 블랙베리 팬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소프트 자판에 익숙해진 이들을 겨냥해 이런 자판을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변화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지는 알 수 없다.
키보드는 단순히 문자 입력을 위해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앞서 출시했던 블랙베리 프리브와 마찬가지로 키보드를 위아래로 문지르거나 좌우로 밀거나 당기면 화면을 상하좌우로 스크롤한다. 인터넷을 할 때는 위아래 스크롤을, 사진을 찍을 때는 카메라 설정을 조절하는 좌우 다이얼로 작동한다. 화면을 직접 터치 하지 않고 키보드에서 방향으로 움직이면 화면에 반응이 나타나는 점은 재미있다. 물론 이 기능은 블랙베리 프리브 때도 경험한 바 있지만, 그 때보다 슬라이드 키보드가 아니라는 점에서 좀더 효율적으로 쓸 듯하다. 키를 길게 누르면 빠르게 실행하는 단축키 기능도 잘 살아 있다.
화면은 4.5인치로 큰 편은 아닌데, 아래쪽에 키보드와 소프트 메뉴 버튼이 들어간 터라 작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프리브 같은 슬라이딩 키보드 방식이 아닌 일체형으로 만들면 좀더 얇아질 것이라 기대했던 두께는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두텁게 보일 정도다. 누군가는 두터운 만큼 손에 쥘 때 편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더 얇고 손에 쥐기 편해야 칭찬받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화면 해상도는 1080×1620. 해상도는 높지만, 긴 화면비는 아니다. 키보드와 함께 작업할 대는 효율적일 테고, 동영상을 즐길 때는 조금 애매하게 보일 수도 있다.
본체는 알루미늄 프레임이다. 그렇다고 알루미늄 재질을 살리려는 데만 욕심을 내진 않았다. 전면은 그런 대로 알루미늄 느낌이 있으나 뒷면은 아니다. 대부분을 가죽으로 덧댄 뒤 그 위에 은빛 블랙베리 곰발바닥 로고를 새겨 블랙베리답게 만들었다.다만 이어폰 단자가 있는 상단 부분의 프레임이 하나로 완벽하게 덮은 게 아니라 부속처럼 절단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
블랙베리 키원의 제원은 퀄컴 스냅드래곤 625에 3GB램, 32GB 저장 공간, 아드레노 506 GPU 등이 들어갔다. 제원 자체만 보면 플래그십용 제품이라 하기에는 전투력이 약해 보인다. 1천200만 화소 소니 IMX378 이미지 센서를 쓴 후면 카메라, Cat.6 규격 모뎀을 탑재한 점도 전투력을 증가시키긴 어렵다. 고속 충전도 마찬 가지. 따지고 보면 대부분 퀄컴의 기술력이 상당 부분 반영된 특징인 셈이다.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 7.1 누가를 채택했다.
물론 블랙베리의 전투력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서 달리긴 했다. DTEK라 부르는 시스템 모니터링 소프트웨어는 은밀히 시스템의 위협을 감시한다. 개인 정보를 취급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감시하고 추적하면서 개인 정보가 새는 것을 시스템 안에서 차단한다. 이를 보안 등급으로 표시해 한눈에 그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DTEK에 대해선 이미 블랙베리를 쓰고 있는 사용자에게 새로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사실 블랙베리 키원을 직접 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 블랙베리보다 여전히 기존 블랙베리의 연장선에 있다는 인상이 짙다. 비록 신선한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지 몰라도, 블랙베리는 그냥 블랙베리로 남게 되는 점에서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첫 출발이 기대 이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것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기에 너무 조급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연말까지 계속 새로운 블랙베리를 만날 기회는 더 이어질 것이라는 TCL CEO의 말을 좀더 믿고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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