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 게임의 추억 때문에 다시 꺼낸 CM-3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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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32L을 꺼냈습니다. 정말 오랜 만에 꺼내본 것 같네요. 한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원래 아이보리 색 몸통이었는데, 저도 모르는 새에 누렇게 변해 버렸네요. 그만큼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것이겠죠.


CM-32L은 롤랜드의 MIDI 음원 모듈입니다. 음원 모듈이란 악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은 값싼 PC 사운드 카드도 악기의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재생하지만, 80년대 말에는 MIDI 음원 모듈을 써야만 악기 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음원 모듈이 아닌 애드립(Adlib) 같은 음악 카드도 있었는데, 이는 주파수 변조를 이용해 기계적인 소리를 다르게 내는 것 뿐이어서 실제 악기에 가까운 소리를 낼 수 있던 CM-32L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지요. 실제 악기 소리를 내는 장치니 정말 비싼 거라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원래 음원 모듈은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쓰는 장치지만, 저는 오직 게임을 하기 위해서 산 것이었습니다. 자주 들렀던 어느 PC 매장에 CM-32L의 전신이었던 MT-32를 거쳐 나오는 게임 음악을 한번 듣고는 바로 이거야 하고 살 수밖에 없던, 음원 모듈은 그만큼 감동적인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소리의 질은 지금이 훨씬 좋지만, 디지털 음원이 많지 않던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소리였는데, 그 때의 게임음악을 듣고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 모듈을 산 뒤에 더욱 게임에 미쳐 살았는데, 당시 이 모듈에서 듣기 좋은 음악의 게임을 만들었던 제작사는 시에라 온라인, 다이나믹스, 마이크로프로즈, 오리진, 웨스트우드 등입니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을 선보인 곳은 시에라 온라인과 다이나믹스(나중에 시에라 온라인에 합병)였는데, 이 둘은 어드벤처 게임으로 매우 잘 알려진 제작사들이었습니다. (애석하지만 지금 이 회사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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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어드벤처 게임의 인기가 사그라지고 새로운 사운드 모듈과 사운드 카드의 능력이 좋아지면서 CM-32L의 전원을 켜는 일이 점차 줄었습니다. 사운드 캔버스라고 부르는 롤랜드의 후속 기종이 나오면서 CM-32L을 지원하는 게임의 수도 급감했지요. 결국 방 구석 사물함 속에 넣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퇴물이 다 된 CM-32L을 다시 꺼낸 것은 옛 게임 음악에 대한 추억 때문입니다. 사실 윈도로 넘어 오면서 게임 실행 방식도 달라지고 미디 음원을 쓰지 않고 원음을 그대로 들려주는 등 게임 사운드는 발전했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과거 멋진 미디 음악을 들려줬던 도스(DOS) 게임들이었죠. 지금도 도스 박스를 실행해 옛날에 즐겼던 도스 게임을 실행할 수는 있는데, 음악이 빠지니 옛날만큼 흥미가 살아나지 않더군요. 때문에 CM-32L을 다시 꺼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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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더군요. 종전에는 이 장치를 쓰려면 MPU-401이라는 PC 인터페이스 카드가 필요했습니다. ISA 방식의 카드였는데, 훗날 ISA 인터페이스가 사라지면서 이 카드도 쓸 수 없게 되었지요. 대신 MIDI 장치를 연결할 수 있는 별도의 인터페이스들이 여럿 나왔는데 MPU-401과 호환되는 것은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도스박스를 보니 USB 미디 케이블만 있어도 된다고 하기에 얼른 주문했습니다. 참 조악하다 싶지만, 그래도 USB 단자에 꽂아주니 드라이버를 따로 잡지 않아도 스스로 인식되더군요.


도스박스의 미디 옵션 값을 바꾼 뒤 게임 설정에서 미디 모듈을 지정하고 실행하니 그 때 들었던 소리가 그대로 납니다. 아직 고장 안나고 작동하는 것도 용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 때 기억했던 음악을 다시 들으니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어제까지 음악이 괜찮았던 시에라와 다이나믹스, 오리진의 게임을 실행해 봤는데, 지금 들어도 음악 만큼은 정말 괜찮은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퀘스트 3와 폴리스 퀘스트 2, 라이즈 오브 드래곤, 래리 2, 윙 코맨더, 스트라이크 코맨더, 중국지심, 코드네임 : 아이스맨, 실피드, 스텔라 7, 울티마 6… 이러한 게임들의 음악을 듣다보니 스페이스 퀘스트 3는 본의 아니게 게임을 끝까지 다시 즐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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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디 음악을 들어보고 싶은 도스 게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게임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디 음원으로 들었던 음악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팝송과 가요를 들으며 추억을 쌓았을 이들과 다르게 게임 음악을 들으며 게임을 기억하고 있던 별난 청춘이었나 봅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

아무튼 도스 게임의 추억 때문에  오랜 만에 CM-32L을 꺼냈는데, 정작 다시 듣게 된 게임 음악을 때문에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듯 싶네요. 그 기억들을 즐기면서 주말 폭염을 잘 견뎌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덧붙임 #


당시 도스 게임의 미디 음악을 듣고 싶은 분을 위해 소개합니다. ^^


시에라 사운드트랙 콜렉션
http://www.queststudios.com/quest/collection.html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21 Comments

  1. 2010년 8월 23일
    Reply

    루카스아츠에서 나왔던 어드벤처 게임을 즐기던 때가 바로 며칠 전 같은데… 그때가 그리워지네요.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설마 도스 에뮬레이터로 며칠 전에 즐겨보신건 아니시구요? ^^ 다시 즐겨도 재밌을 거에요~

  2. redzone
    2010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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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가지고 있었던(동생이 가지고 나간 후 행불…-_-) 사캔이 보이는 군요..
    사캔의 전신이 CM-32L이란걸 처음 알았네요….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그 사캔도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요? ^^;

  3. 2010년 8월 23일
    Reply

    저는 애드립->옥소리 테크를 타서…

    게임 사운드 설정할때마다 롤랜드 MT-32를 보면서 저걸 언제 써보나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옥소리도 음원 시장에 도전했다가 된서리를 맞았었죠. 참 비운의 사운드 카드였던 것 같습니다. ^^

  4. 2010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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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드벤쳐의 명가 시에라를 오랜만에 접해봅니다…=)

    전 연령대가 칫솔님 보다 어려서 퀘스트 시리즈는 고블린3(Goblins Quest 3) 밖에 즐기지 못했지만,
    정말 시에라의 어드벤쳐 게임은 지금 즐겨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재밌는 것 같습니다.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의도적으로 제 나이를 높이시는군요. ㅋㅋ 시에라 게임은 지금 즐겨도 명작은 명작이네요~ ^^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정말 추억의 게임들 많죠. ^^

  5. 2010년 8월 23일
    Reply

    ㅎㅎ 너무나 갖고 싶어 알바하던 기억이 나네요.
    결국 그 돈은 술값으로 날렸지만요.
    선배 집에서 듣는 도스게임들의 미디음을 잊을 수가 없네요. ^^
    집에서는 언제나 띠링띠링 소리만… ㅋ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모은 돈을 술 값으로 날리시다니.. 그게 더 대단한데요? ^^;

  6. 베이스박
    2010년 8월 24일
    Reply

    처음 MIDI 로 작/편곡 배울때 학원에서 쓰던 장비군요.. 알바해서 샀던 SC-55도 보이고.. 나중에 음악때려치우고 IT쪽으로 돌아서면서 다 팔아서 컴 두대 사서 서버/네트워크 공부했더라는.. ^^; 추억의 장비네요.. ㅎㅎ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평생 먹을 거리를 해결한 수업료로 활용하셨군요. 저도 그럴 걸 그랬나 봅니다. ^^

  7. 2010년 8월 24일
    Reply

    아.. 사켄~~~ Sound Canvas.. SC-55를 갖고 있었지요..
    친구가 MIDI로 작업한다기에 빌려줬는데 그냥 ‘멍시렁~’ 해버렸다능.. -.-;
    미디음원으로 음악을 듣는게 정말 10년전에는 가히 최고였는데..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왜 사켄은 먹튀가 이리도 많은 건가요? ^^

  8. Jae Chung Lim
    2010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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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년전 칫솔님과 함께 잡지사 필자하던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

    나도 집 어딘가에 쳐박혀 있을 야마하 TG-100이랑 SC-55 MK2… 함 찾아 봐야할듯… ㅋㅋ

    롤랜드는 스트링 소리가 좋고, 야마하는 타악기 소리가 좋았던 기억이… 게임은 CM-32L이 짱..!!!

    • 칫솔
      2010년 8월 25일
      Reply

      그러게… 겜 필자 하던 시절이 그립구만.. 겜만 열나게 할 수 있던 그 때가 정말 좋았는데 말이지. ^^

  9. 2010년 8월 25일
    Reply

    친구에게서 돈 주고 사서 스트라이크 커맨더에서 소리가 나올때의 그 신기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수가 없었죠 ㅋ
    그때는 사운드 드라이버도 설치하다 보면 메모리 부족해서 게임도 안되고 참 난리피웠고
    SoundBlaster의 위엄이 대단했는데, 이제는 내장 사운드로도 충분하다 보니 확실히 예전보다는 시들한거 같아요 ^^;

    • 칫솔
      2010년 8월 26일
      Reply

      그러게요. 게임이 옛날 같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음악이 주는 느낌이 변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네요. ^^

  10. 불의정령
    2022년 1월 11일
    Reply

    저는 LAPC-1 으로 즐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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