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크기의 땅과 800만이 채 되지 않는 인구.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강력한 창업 환경을 갖춘 이스라엘은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창업 기관이 배우려고 애쓴 창업의 교본과도 같았다. 유대 자본과 군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인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작은 내수 시장과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는 중동 국가간 관계에서 대기업 정책 대신 소규모 창업 기업을 세계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창업 생태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창업 환경을 분석하고 우리 지형에 맞는 제도로 바꾸고 무지막지한 물량을 투입한 지난 몇 년의 노력으로 우리의 창업 생태계는 부쩍 성장했다. 실제 일주일 넘게 머무르며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기업과 시설을 둘러봤을 때 제도적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극복할 수 없는 창업 환경에 만든 문화적 차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도만으로 극복하기 힘들 것 같은 창업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를 해소할 방법을 이제 찾아야 할 때다.
이스라엘의 관문, 벤 구리온 공항의 입국 수속은 독특한 경험 중 하나다. 새로운 나라를 방문한 기념이자 증거로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고 싶다 해도 이스라엘은 결코 도장을 찍어주는 일이 없다. 대신 입국에 문제가 없다면 심사관으로부터 지하철 승차권처럼 생긴 표를 하나 받게 된다. 이스라엘과 긴장 관계에 있는 다른 중동지역으로 갈 때 입국 거부 같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만든 입국 절차다. 출국 때도 마찬가지. 역시 출국 때도 비슷한 표를 받아야 나갈 수 있다.
이처럼 낯선 이스라엘의 색다른 입출국 체계를 경험하면 왠지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것 같은 설레임을 느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읽는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금요일 해가 지는 순간부터 대중 교통도 다니지 않는 안식일을 시작해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 쉬고 일요일부터 일터로 나가는 생활 방식, ‘코셔'(Kosher)라는 이곳만의 독특한 음식 문화는 분명 다른 세상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런 다른 생활 풍습의 차이를 경험할 수록 이곳은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더 큰 기대를 갖게 만든다. 단지 그 기대감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 뿐이다.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밤길을 달려 도착한 텔아비브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부터 스타트업의 현실을 둘러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아주 큰 혼란에 빠졌다. 우리가 그토록 닮으려 했던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제도가 훨씬 발전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깨진 것이다. 여러 창업 시설은 우리 주변에 만들어진 창업 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고 육성 제도도 아주 다르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창업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고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제도를 모방해 잘 실행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환상을 깨뜨릴 만큼 비슷한 모습을 봤다는 점은 정말 의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창업을 위한 제도적 측면만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정작 텔아비브와 하이파, 예루살렘의 창업 시설과 기관, 여러 스타트업의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도의 차이보다 더 와닿았던 것은 창업과 관련한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다. 작은 내수 시장에 기인한 소규모 글로벌 창업, 세계의 유대 자본과 인맥, 18세에 가야 하는 군대에서 형성된 군맥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특징으로 꼽는 이들이 많지만, 스타트업이나 창업 기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보다 더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무엇이 다를까? 이스라엘 세 도시에서 본 건 스타트업간 경쟁을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대신 스타트업의 협업과 공유는 쉽게 눈에 띈다. 공동 공간에 있든 개별 공간에 있든 작은 스타트업들은 서로에게 말을 하고 귀를 기울인다. 우리 창업 생태계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스타트업끼리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공유와 협업의 문화는 아직 낯선 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받은 영향 때문에 더 나은 기술을 가진, 또는 더 나은 마케팅을 가진, 또는 더 나은 그 어떤 것을 가진 스타트업끼리 생각을 나누고 능력을 공유하는 데 어색함이 없다. 그들 특유의 허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스타트업간 공유와 협업이 오히려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에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과정도 어딘가 다르다. 단순한 생각만으로 창업을 시작하더라도 그것을 사업 단계로 끌어 올려 그 이후 생존에 도움을 주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비영리 액셀러레이터들이 값싸게 시설과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직접 투자 대신 짧은 기간 안에 그것을 사업화할 수 있는 가치와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준비와 초기 투자자를 연결하는 일에 매진한다. 텔아비브 도서관을 떠난 스타트업의 70%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부분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역할의 액셀러레이터가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아이디어만 받아들여 이를 구체화시키는 곳은 그리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더구나 공공기관이 주도해 창업 아이디어를 모으는 경우도 이를 사업화하는 단계에서 자금만 지원하고 스타트업에 맞는 체계적인 관리가 부족해 실제 창업이나 그 이후 장기간 생존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창업을 위해 지원하는 정부 자금은 엄격하게 집행한다. 이스라엘은 많은 창업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민간을 제외한 정부 지원은 OCS(Office of the Chief Scientist)가 맡고 있다. OCS는 이스라엘 경제부에서 연구개발 자금의 집행을 맡은 부서로 유일하게 창업 관련 자금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심사하고 집행한다. OCS는 독자적으로 자금을 집행하는 것보다 하이파의 하이센터나 예루살렘의 VLX 같은 민간 벤처 캐피털과 함께 인큐베이팅 단계에서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거나 소규모 펀드의 지원을 처리한다. 이스라엘에 머무르는 동안 방문했던 하이 센터와 VLX는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생존과 성장이 가능한 스타트업을 선별한 뒤 OCS의 승인을 받아 인큐베이팅 자금을 집행하는 것은 똑같다. 불필요한 세금 낭비를 없애고 민간에서 필요한 만큼 공급하는 것은 여러 공공 기관에 막대한 예산을 나눠 배정하고 창업 자금을 풀어 스타트업 수를 늘리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어쩌면 우리와 다르게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생존’이다. 아이디어를 싹 틔우고 스타트업의 생존 가능성과 성장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맞춤형 도움을 생각한 것은 이스라엘이 처한 특수한 역사와 정세의 영향을 배제하기 힘든 부분이긴 하다. 그렇다해도 단순히 제도를 새로 만들고 이전의 것을 보강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창업 기업들이 가능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차이는 우리와 다른 부분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꼭 이스라엘에 맞춰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제도만 따라한다고 이스라엘 같은 창업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라서다. 이미 제도적으로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 비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의 창업 제도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우리가 창업을 하고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가 됐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할 때는 아닌지 궁금할 뿐이다.
글의 내용하고 관련은 없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중동 특히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서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뭐랄까요. 조금 애매한 부분입니다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관계는 크게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는 가자 지구쪽은 확실히 경계한다고 해야 할까요. 팔레스타인의 지위와 지역이 애매해 주변에서 지켜보는 게 더 머리 아픈 일인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