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끼리 실패한 합의서, 망 중립성

사실 필자는 망 중립성과 관련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단지 언젠가 이로 인해 조금 또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용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한마디로 구경꾼인 것이다. 가이드라인에 들어가는 문장 한 구절 때문에 싸우고 있는 이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때문에 단지 구경꾼으로써 이 기준안과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의 입장과 좀 동떨어진 싸움 구경을 한 관전평이나 몇 자 써보련다.


1. 그동안 논란이 되고 있는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은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에서 지난 주 ‘통신망의 합리적 관리 및 이용에 관한 기준(안)‘이란 이름으로 공개했다. 그런데 이 기준안이 공개되자마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망 사업자, 서비스 사업자, 시민 단체들은 이번 기준안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담고 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한쪽에서는 이번 기준 안이 망 사업자에게 일방적으로 유지한 독소조항이 많다고 하고, 망 사업자는 오히려 자기들이 망을 관리할 수 없는 제약 사항이 많다고 투덜거린다.


여기서 누구 말이 맞고 틀리냐는 것을 일일이 따지는 데 시간을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망 중립성이란 누구 편을 들기 위해 논의해 왔던 게 아니었으니까. 누구를 이겨야만 끝나는 파워 게임도 아닌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이렇게 보니 어쩐지 서로 이기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처럼 보이는 건 착각인가? 내가 이상한 건가? 남에게 불리한 조건은 눈감고 내게 불리한 조건만 불만인 이들끼리 무슨 합의를 기대하나.


2. 그런데 애초부터 망 중립성 논의가 제대로 되기 힘든 것은 다른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국현님의 말 대로 순환적 생태계라는 경제적 관점의 문제 의식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이 논의에 자리한 이들의 태도와 의식 자체에 대한 문제가 더 커보였으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다중 추돌한 교통사고 피해자들끼리 싸우는 느낌이다. 즉 누가 차를 박았든 내가 더 피해를 입었으니까 손해 배상은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 같은…


선깔고 주파수 사고 망은 다 구축해 놨는데, 그것으로 돈을 벌어 가는 게 배 아픈 망 사업자, 조금이라도 서비스가 잘 될라치면 망 차단하겠다는 협박 때문에 이렇게 가면 개발 못하겠다는 서비스 사업자, 이미 돈은 다 냈는데 내가 낸 돈만큼 제대로 된 서비스를 못받는다고 불만인 이용자. 약간 과장되었을 지는 몰라도, 이런 주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자기가 겪고 있는 피해 의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망 중립성이란 게 이들 눈에는 그 피해 의식을 보상받을 수 있는 보상금처럼 비쳐진 것은 아니었을까?


3. 이번 기준안은 명백히 법이 아니다. 물론 법제화를 위한 과정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이런 기준안을 애타게 기다린 것은 이해 당사자들의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요건으로서, 또는 어떤 행위를 제약하기 위한 근거로써 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는 이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망 중립성 기준안은 갈등으로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한 업계의 합의와 약속의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거와 수단 이전에 그 합의 정신부터 공유되어야 하지만, 이들은 팽팽한 대립 속에서 내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만 옳다고만 할 뿐 그 정신에 기초한 양보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하지만 기준안은 법이 아니다. 안지켜도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왜 그 기준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되새겨 봤음 싶다. 모두가 조금씩 손해를 감수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뤄낸 사회적 합의가 없는 기준안을 근거로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갈등만 지속될 것이 뻔한 실패한 합의서는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나?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4 Comments

  1. 2012년 7월 18일
    Reply

    크게 공감합니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군요.

    • 칫솔
      2012년 7월 24일
      Reply

      네. 사실 망중립성의 중요함은 인지하고 있음에도 합의를 위한 마음가짐이 아직 덜 된 건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2. 2012년 7월 29일
    Reply

    이런 문제 아닌 문제가 불궈지는걸 보면서
    차라리 KT와 SK를 다시 국영화 시키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칫솔
      2012년 8월 4일
      Reply

      현 상황이 답답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경쟁과 합의의 정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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