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어찌개와 같은 디지털 컨버전스는 맛이 없다

요즘 사람들.. 궁하지 않는 이상 남은 음식 넣어 끓인 섞어찌개를 먹는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주 재료 써서 끓인 찌개에 한두 가지 다른 재료를 섞어 먹기는 하지만, 다 만든 음식 섞어 끓인 찌개는 거의 못보고 자란 세대들일 겁니다. (그렇다고 이걸 꿀꿀이 죽이라 보면 안됩니다. 찌개이니 만큼 밥은 안 넣고 끓이거든요 -.-;)


섞어찌개를 먹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게 참 오묘해요. 왜냐.. 처음부터 재료를 나눠 끓인 게 아니라 이 음식 저 음식 섞어서 끓이다보니 그 음식에 있던 맛이 국물에 섞이면서 제3세계의 맛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찌개용 재료로 쓴 음식들이 각각 아무리 맛있다 하더라도 일단 섞어서 끓여보면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이상 그 국물맛이 생각만큼 시원하거나 얼큰한 것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거죠. 뭐.. 가끔은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섞어찌개도 나오긴 합니다만, 그거야 말로 경험과 운을 섞어야 낼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젊은 사람들이 음식 섞어서 맛내기가 결코 쉽지 않걸랑요. 맛이 안 나는 이유요? 그거 무척 단순합니다.


그 음식마다 다른 재료와 양념을 써서 간을 맞춘 뒤 지지고 볶아서 만든 것이라 따로 먹을 때만 그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즉 찌개용으로 끓이기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닌지라 섞어봤자 그 음식의 맛들이 찌개까지 맛있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 섞어찌개를 꺼내 쓰게 된 것은 ‘컨버전스’ 때문이에요. 융복합이라는 말도 쓰긴 하는데, 여러말 쓰면 복잡하니까 그냥 컨버전스로 말하지요. 컨버전스 장치는 한 가지 장치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할 수 있는 걸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복합기인데.. 요즘은 휴대폰이건 MP3 플레이어건 다 컨버전스라고 말하니 어떤 장치만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겠네요.

그런데 컨버전스란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닙니다. 앞서 섞어찌개가 맛없는 이유를 설명한 게 이 때문인데요. 여러 재주를 담은 컨버전스 장치라도 특별한 재미를 주지 못할 때는 그저 그런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디지털 업체 담당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십중 팔구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MP3 플레이어도 만들고, 동영상 플레이어도 만든다. 그런데 둘 다 따로가는 것보다, 그리고 MP3 플레이어쪽 수익이 줄어드니 둘 다 버리고 합친 것을 만들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컨버전스 기업이다’고… 마치 컨버전스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그런 광풍이 분다고나 할까요?


지금 웬만한 가제트(소형 디지털 장치를 일컫는 말)를 생산하는 중소 업체라면 다 똑같습니다. 컨버전스로 살아 남겠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글쎄요.. 섞어찌개야 남은 음식으로 만들어서 돈이 안든다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두 가지를 섞으면 값이 오르는 게 이치잖아요. 업체들은 이용자의 호주머니 사정과 관련된 궁극적인 문제를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짙은데, 그러다 요즘 수익 줄어 고생하는 업체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업체들이 말하는 컨버전스는 대단히 위험하고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어요. 복잡하게 설명하는 건 좀 그렇고.. 예를 들어 MFP(multi function printer), 즉 복합기를 한번 살펴보죠. 뭐.. 요즘은 모든 성능이 다 좋아졌다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초창기 복합기가 성공한 이유는 복합기를 쓸 사람들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에 있다고 봐야 겠지요. 문서 인쇄를 하다가 스캔도 하고 복사도 하고 팩스도 보내니 이를 필요로 했던 소호나 SMB(중소 비즈니스) 시장에서 확실한 수요를 끌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복합기의 생명은 인쇄 능력이에요. 문서와 복사, 팩스를 받을 때 결국 인쇄를 잘하지 못하면 복합기의 성능이 떨어진다고 느낍니다. 왜냐, 이 작업을 가장 많이 하기 때문이죠. 스캐너나 팩스 모뎀의 능력은 그 다음 문제에요. 결국 복합기는 인쇄 능력이 담보돼 있어야 하는 데, 그 기술은 프린터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죠. 만약 복합기 제조 업체가 프린터 기술을 갖고 있지 않거나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그 복합기의 생명은 길게 가지 못합니다. 때문에 프린터 업체들은 복합기를 내놓으면서 다른 재주보다도 꼭 프린팅 능력을 검증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업체들은 다릅니다. 이것저것 다 섞어 놓고는 다 된다고만 합니다.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를 볼까요? PMP에서 가장 많이 쓰는 재주는 동영상이죠. 3.5인치나 4.3인치 화면을 활용할만한 컨텐츠라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좋은데요. 지금의 PMP로는 모든 동영상을 다 재생하기 어려워요. DSP의 능력으로는 변화무쌍한 코덱과 크기로 만든 동영상들을 돌리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문제는 업체들이 PMP의 동영상 재생 능력을 높이는 노력에는 생각보다 게으릅니다. 아니, 아직까지는 서툴다고 봐야지요. 실수도 많고요. 또 빨리 만들어 팔아야 하니까, 조금 사소한 문제가 보여도 나중에 펌웨어를 업그레이드로 해결하기로 하고 대충 때우는 업체도 적잖습니다.


그 결과 동영상의 호환성을 높이거나 검색을 쉽게 하거나 이용자가 보기 편한 화면 상태로 만들거나 자막을 고르거나 같은 일들이 소홀해지니 PMP가 거기서 거기로 보입니다. mp3 듣기나 사진 보기 같은 다른 재주들을 소개하려고 애쓰지요. 하지만 이마저도 썩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DSP에서 재생하는 MP3의 음질이 썩 좋지 않고 음질을 높일 수 있는 다른 칩을 쓰지 않는데다 사진 재생도 재미있게 보여줄만큼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지금 나오는 PMP는 대부분 DSP 제조 업체에서 주는 레퍼런스에 따라서 하드웨어를 만들고, 그 위에 임베디드 OS를 심는 형식이어서 기술력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PMP 중에는 어느 한 재주만이라도 제대로 갈고 닦아서 넣은 것을 찾는 게 어렵다는 말인 셈이죠. 호환성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것도 DSP가 좋아진 결과라고 봐야지, 근본적으로 동영상을 편하게 보는데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것은 없다고 봅니다. 다른 재주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애초에 동영상 플레이어만 집중적으로 만들고, ‘우리가 만든 PMP는 동영상을 잘 볼 수 있다’고만 말했으면 어땠을까요? 그 위에 덤으로 mp3 듣기와 사진 보기를 얹은 것이라면 얘기는 많이 달라집니다. 말그대로 덤이니까 별 문제가 안되는데, PMP는 모든 게 주요 기능이라 한가지도 소홀해서는 안되죠. 모든 기능을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소비자에게 욕을 먹게 됩니다. 스스로 덫에 빠지게 되는 셈이죠.


그런 면에서 애플 5세대 아이팟이나 SCE(sony computer entertainment)의 PSP에서 주의깊게 볼 부분이 있어요. 5세대 아이팟은 동영상 재생은 되지만, 애플이 어디까지나 음악 플레이어로 소개하는 점. PSP 역시 동영상 재생이나 여러 부가적인 재주를 쓸 수 있지만, 충실하게 휴대 게임기로 알리고 있는 점인데요. 즉, 이 두 장치의 공통점은 주 기능이 무엇이냐를 부각시켜 그 시장에 있는 이용자를 확실하게 끌어들인 뒤 부가 기능을 쓰는 것은 이용자의 선택에 맡긴다는 점입니다. 맛있는 요리에 곁들여진 반찬 정도로 부가 기능을 만들었으므로 오히려 부담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애플과 SCE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요. 둘 다 각 장치에서 쓸 컨텐츠를 직접 공급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애플은 아이튠으로 mp3와 동영상을, SCE는 UMD 게임을 각각 유통하는데 두 장치에서 문제 없이 돌릴 수 있는 각각의 컨텐츠를 공급함으로써 이용자는 자기가 산 하드웨어에 대해 높은 신뢰를 갖게 되는 점도 보이지 않는 효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 PMP는 주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많은 재주를 내세워서 이용자를 홀리고 있는 셈이죠. 알고 보면 동영상을 보는 게 주 기능인데 이것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부가 기능을 함께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값도 비싸고요. 즐길 컨텐츠도 알아서 구해야 하는데, 만약 그 동영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가 갖고 있는 PMP에 대해서 슬슬 실망하게 됩니다.


PMP의 예에서 보면 컨버전스로 무조건 여러 장치를 섞는 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하드웨어적 컨버전스에서 주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 제품의 정체성을 찾는게 어렵다는 말이지요. 잘 만든 MP3 플레이어에 동영상이 되는 것이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겁니다. MP3 플레이어가 수익이 적다고는 해도 여전히 시장 파이가 가장 크기 때문에 아직도 건져 먹을 건 더 많습니다. 뭐… 우리는 고상해서 그런거 주워 먹을 생각없다는 업체가 한 곳 있는데, 지금 하는 사업이 2년 안에 자리 잡지 못하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컨버전스의 의미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섞는게 아니라 서비스를 섞어야 진정한 컨버전스라는 거에요. 애플과 SCE의 예를 보면 알겠지만, 각 장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직간접으로 전해질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잖아요. 즉 이용자는 한 장치에서 여러 재주를 즐기는 것은 물론 관련 컨텐츠를 편하게 즐길 수 있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이런 컨텐츠 유통이 융합되어야 제대로 된 컨버전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애플이나 SCE는 기업 규모가 장난 아니지만, 우리나라 가제트 업체들은 그만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사실상 없답니다. 그러해서 제발 좀 뭉쳐서 뭔가 이뤄냈으면 바라지만,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보니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아무튼 요즘 하도 말많은 컨버전스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을 정리해 보려던 참에, 어떤 pmp 기사에 섞어찌개처럼 맛있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고는 ‘섞어찌개는 어설프게 끓이면 맛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2 Comments

  1. 2009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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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흐.. 공감합니다… 헉.. 그리고보니 2006년도 글이군요! ㅎㅎㅎ

    • 칫솔
      2009년 8월 28일
      Reply

      그냥 주절주절 했던 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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