칫솔_초이의 IT 휴게실


글쓴 이 - 칫솔(CHiTSOL, PHILSIK CHOI) | 칫솔질 l 2017/03/28 23:55



*이 글은 KISA의 MWC 특별 리포트로 기고한 '스마트폰, 새로운 셈법의 시대에 들어서다' 중 일부입니다. 전체 내용은 KISA 리포트를 내려 받길 권합니다.

블랙베리와 노키아의 귀환은 말 그대로 시장 개척을 위한 제조사의 전략적인 선택이라면 기존 제조사들에게 소비자 경험의 확대를 위한 트렌드 융합을 기대할 만했다. 지난 해에서 이어진 ICT 트렌드는 물론 CES에서 부상한 키워드를 전이한 스마트폰을 통해 모바일이 얼마나 더 진화된 경험을 줄 수 있을 지 기대를 모은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MWC 2017의 스마트폰은 이 기대를 상당히 어긋났다. 종전 스마트폰에서 볼 수 없는 긴 화면, 독특한 카메라 같은 몇몇 새로운 시도는 눈에 띈 반면, 스마트폰에서 요구되는 혁신은 오히려 실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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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WC17에서 처음 공개된 블랙베리 키 원

MWC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내놓은 곳은 한둘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TCL 블랙베리 키 원과 HMD 글로벌 노키아 시리즈 외에도 LG G6, 화웨이 P10 시리즈, 지오니 A1 플러스, 모토 G5 시리즈, 소니 엑스페리아 XZ 프리미엄과 XA1, ZTE 액손 7 맥스 등이 부스를 채웠다. 비록 삼성의 전략적인 선택으로 갤럭시 S8을 이번 MWC에서 볼 수 없었다 할지라도 신제품 수만 보면 가장 풍요로운 시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스마트폰 사이에서 풍요 속 빈곤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은 인공지능이나 가상 현실, 증강 현실 같은 트렌드를 엮기 어려운 문제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마트폰이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나 실제로 새로운 재주를 추가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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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어시스턴트가 적용된 LG G6. MWC에서 유일하게 AI 비서 서비스를 탑재했다.

이번 MWC에서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부분은 인공 지능 기반 지능형 음성 비서다.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 알렉사, 마이크로소프트 코타나 등 기대를 모으는 인공지능 비서 플랫폼은 여럿 공개됐던 터라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선택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MWC 2017에서 음성 비서를 결합한 스마트폰은 LG G6뿐이다. 이번 MWC에서 구글 어시스턴트 진영의 공식 스마트폰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G6가 유일하다.

이처럼 수많은 제조사가 음성 비서를 채택하지 않은 데는 여러 배경이 있다. 먼저 언어 장벽으로 인한 음성 비서 플랫폼의 범용성이 떨어질 뿐더러 자체적으로 인공지능 기반 음성 비서 시스템의 개발을 진행하는 만큼 다른 음성 비서 플랫폼 도입에 신중해 졌다. 더구나 모바일 운영체제로 강력한 입지를 다진 구글과 같은 기업의 협력은 차기 플랫폼으로 인식되는 음성 비서 시장의 주도권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제조사의 의식도 이 같은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음성 비서의 진화에 필요한 음성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스마트폰 같은 대중적인 장치에 기능을 실어야 하는데, 스마트폰 초기 선택지가 거의 없었던 모바일 운영체제에 비해 지금 음성 비서 시장의 선택지는 훨씬 넓은 상태여서 스마트폰 제조사가 서두르지 않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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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 화면을 탑재한 소니 ‘엑스페리아 XZ 프리미엄. VR은 탑재하지 않았다.

가상 현실과 거리도 더 좁히지 않았다. 이번 MWC에서 공개된 스마트폰은 이미 가상 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성능과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다. 특히 엑스페리아 XZ 프리미엄은 그동안 모바일 가상 현실의 약점으로 지적된 디스플레이의 약점까지 극복할 수 있는 4K 디스플레이를 채택했다. 하지만 소니는 이 스마트폰에 가상 현실 플랫폼을 탑재하지 않는다. LG나 화웨이, 그 밖의 다른 스마트폰 제조사 가운데 모바일 가상 현실 플랫폼을 탑재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난 해와 가상 현실을 도입하려던 여러 움직임과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모바일 시장에서 가상 현실 도입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꼭 필요한 운영체제와 달리 모바일 가상 현실은 옵션이다. 이를 넣으려면 가상 현실이 스마트폰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거나 그 생태계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오큘러스 플랫폼을 독점해 스마트폰과 가상 현실을 단순한 옵션 이상의 차세대 전략으로 접근하는 삼성과 달리 다른 제조사들은 똑같은 전략을 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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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VR을 활용한 다양한 어트랙션을 마련했던 삼성전자. 다른 제조사나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 정도 투자는 하지 않았다.

지금 스마트폰 제조사가 도입할 수 있는 확실하고 현실적인 선택은 모바일 가상 현실 플랫폼인 구글 데이드림 뿐이다. 구글은 이를 특정 제조사에게 독점 공급하는 전략 대신 개방된 전략을 취한다. 그런데도 많은 제조사가 이 플랫폼을 탑재하려면 구글의 하드웨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레이턴시처럼 가상 현실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제조사 책임이다. 구글 데이드림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다면 모르지만, 굳이 제조사에 이득이 될지 안될지 모를 다른 플랫폼을 위해 자금을 들여 스마트폰을 개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글이 데이드림에 더 열성적으로 홍보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삼성처럼 CES
나 MWC 같은 주요 전시회마다 대규모 어트랙션을 만들어 흥미를 끌어내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이번 MWC도 그렇다. 삼성은 가상 현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어트랙션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 반면 구글은 몇 개의 데이드림 뷰를 가져다 뒀을 뿐이다. 구글 데이드림 생태계에 대한 흥분을 끌어낼 만한 활동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글 데이드림은 개방을 앞세워 스마트폰 제조사의 참여를 기대했지만, 전략적인 접근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이번 MWC에서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스마트 제조사의 움직임은 새로운 셈법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이익이 되는 것을 철저히 따져 서로의 힘과 재능을 보탤 뿐, 덤으로 하나를 더 얹어 주는 시대의 끝을 보여준 것이다. 절대 반지의 군주 같은 공통된 적을 향해 칼을 겨누며 개방된 생태계에서 힘을 모았던 이들이었지만, 이제 표준화된 생태계 안에서 각자의 셈법으로 힘의 균형을 맞춰가려는 것이다. MWC 2017에서 스마트폰은 다른 키워드에 비해 덜 돋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스마트폰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우위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산업 전쟁의 새로운 서막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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