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가 급사(急死) 한 뒤 가장 아까웠던 것

지난 일요일에 PC에 깔았던 윈도 시스템이 급사한 일이 생겼다. 데이터를 백업하던 중 갑자기 시스템이 다시 시작되더니 윈도가 부팅을 할라치면 다시 부팅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이 시스템에는 윈도 XP와 64비트 비스타 두 개의 윈도가 깔려 있었고, 두 윈도 모두 선택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F8을 눌러 안전 모드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안전 모드도 부팅이 되다 말다를 되풀이했다. 하는 수없이 윈도 비스타 CD를 넣고 복구를 시도해 일단 비스타 부트 항목을 살려 놓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 부팅은 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윈도를 다시 깔기로 했다. 이번에는 윈도 비스타만 깔기로 했다. 비스타를 쓰면서부터 사실 윈도 XP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참에 단일 시스템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또한 이번 윈도 급사 사건이 윈도 XP를 쓰다가 날아간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도 비스타만 쓰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데 한 몫했다.

일단 비스타가 문제 없이 깔리는 걸 보니 하드디스크 자체가 날아간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하드디스크 자체가 날아간 것이면 비스타를 깔 때 에러가 났을 테지만, 그래도 오류를 내지 않고 깔리는  것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하드디스크에 있던 자료들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스타가 다 깔린 뒤 하드디스크를 뒤져보니 자료는 대부분 그대로 있는 듯 했다. 두 개의 하드디스크에 만들었던 폴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반 폴더에 있는 자료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윈도 문서 폴더(documents and setting)다. 이 폴더는 문서를 비롯한 사진 같은 윈도에서 작업하는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모아 놓는 폴더다. 윈도 바탕 화면의 자료들도 이 폴더에서 찾을 수 있고 각종 프로그램의 세이브 파일도 이곳에 다 모여 있다. 그런데 그 폴더가 열리지 않았다. 아뿔사.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폴더를 열지 못하면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자료들을 단 하나도 건질 수 없기 때문에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폴더가 열리지 않아 그 안의 오래된 자료를 꺼낼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자마자 무엇보다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이제까지 써왔던 기사나 글이 아니다. 돈을 주고 샀던 음악도 아니다. 사진이다. 비록 전문가처럼 잘 찍은 사진도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했던 추억의 사진도 아니건만, 내가 찍은 그 사진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글은 언제든 다시 쓸 수 있지만, 사진을 찍었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첫 DSLR인 D70s를 산게 2005년 여름이었고, 지난해 D2X로 바꾸면서 찍은 사진들은 아마도 3~4천 장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2년 동안 모아 온 내 시간의 기록들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니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4월1일 만우절이라 비스타가 장난을 좀 친 모양이다. 비스타가 두 개의 윈도를 깔았던 시스템에 윈도를 덧씌우면서 종전 윈도가 쓰던 documents and setting 폴더를 windows.old라는 폴더로 옮겨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 폴더가 원래 있던 윈도 폴더를 백업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았는데, 그 윈도와 관련된 폴더(windows, program files, documents and setting)를 통째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폴더를 보자마자 재빨리 사진이 들어 있던 내 문서 폴더를 찾아내 루트쪽으로 옮기고는 사진이 제대로 남아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진은 남아 있는 듯 보였다. 단지 비스타 쪽에서 작업한 사진과 데이터는 여기에 없었다. 그래도 2년의 시간을 기록해 둔 사진을 모두 날려버릴 뻔 한 것에 비하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다.

이번 일로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그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 보면서 그 시간을 간직하고 되돌려보는 것보다는 다른 이가 그 사진을 보고 함께 기억해 준다면 나중에 이와 똑같은 일이 생겨 사진을 다 날린다 해도 그리 아깝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봐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저 이 블로그에 찾아와 ‘메모리즈’라는 카테고리 한번 뒤져 감상하고 가 준다면 그것만으로 고마울 것 같다.

PS 1> 그런데 사진을 되찾자마자 백업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역시나 그 많은 사진을 보고 나니 그 순간 귀차니즘이 도졌다. 아무래도 백업을 하기에는 정신을 덜차린 모양이다. -.ㅡa

PS 2> 비스타의 documents and setting 폴더는 보안성이 강화된 탓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이용자가 직접 폴더 보안 권한을 편집해 개체에 그 권한을 부여해 주어야만 읽을 수 있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4 Comments

  1. 2007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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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일 치루셨군요.
    저도 제 아들녀석 사진 한번 홀라당 날려서 피눈물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어제의 그 멋진 사진은 이런 해프닝 덕분에 볼 수 있었던건가요?^^

    • 2007년 4월 3일
      Reply

      ㅎㅎ 멋진 사진이라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한 번 잃어버릴 뻔(?) 해서인지 좀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기회도 되었고요. 늘 변함없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도 한순간에 잃는 그 마음을 다시 알 게 된 듯 합니다.. 그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

  2. 2007년 4월 3일
    Reply

    주기적으로 씨디 하나씩 구우시죠?^^

    전.. 제 여친님 사진을 죄 날려먹어서..조마조마해 하고 있습니다..-0-;;;

    • 2007년 4월 3일
      Reply

      견습마법사님은 그래도 행복하신 줄 아세요. 두근두근하게 만들어 줄 여친님께서 계시잖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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