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역사 신문 5-더글라스 엥겔바트, 마우스라는 새로운 조작 장치 선보여

벌써 컴퓨터 역사 신문 다섯 번째 포스팅네요. 오늘은 1960년대 말의 소식들입니다. 요전번 글에서 공상플러스님이 마우스 이야기는 언제 올리냐고 했는데, 이제야 올렸습니다. ^^ 딱히 눈에 띄는 사건과 사고는 없었지만,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최초의 마우스를 만든 것이나 인터넷의 전신이하고 하는 아르파넷이 이 때 등장합니다. PC를 좀더 일찍 접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RS-232 포트도 나왔답니다.
아, 앞으로 몇 번 더 포스팅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 이 연재를 올리겠습니다.


[1966년] 컴퓨터끼리 신호 주고 받는 수신기 개발
스탠포드 연구소의 존 반 기엔(John Van Geen)은 컴퓨터 신호와 일반 전화 신호를 분리할 수 있는 수신기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기엔의 수신기는 장거리 전화선을 통해 들어온 신호가 일반 음성 신호가 아닌 데이터 신호일 때 다른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었다. 이 장치가 개발됨으로써 전화선을 이용한 컴퓨터 데이터 전송이 한층 늘어날 전망이다.


최초의 모뎀은 아니지만…
이 수신기는 AT&T가 개발했던 최초의 모뎀을 개선한 것이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최초의 모뎀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1968년] 더글라스 엥겔바트, 마우스라는 새로운 조작 장치 선보여
앞으로는 키보드 대신 다른 장치들이 컴퓨터에 명령을 내릴 지도 모른다. 1968년 스탠포드 대학의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빅 센터에서 열린 컴퓨터 회의(Joint Computer Conference)에서 자신이 만든 키보드와 키패드 그리고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고 조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입력 장치인 마우스를 발표했다. 엥겔바트는 이날 마우스 발표회장에 공상 과학 소설의 사이보그와 같은 차림으로 머리에 마이크로폰을 쓰고 한 손에는 마우스, 다른 한손에는 키보드를 들고 나와 마우스의 성능을 시연했다.
마우스는 바닥에 붙어 있는 철제 바퀴를 직각으로 돌려가면서 화면에 떠 있는 커서를 상화좌우로 움직이도록 만든 장치인데,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작은 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이 마우스는 외형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투박하게 생겼지만, 대부분의 컴퓨터 전문가들은 마우스를 이용해 컴퓨터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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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연구자 더그 엥겔바트
더그 엥겔바트는 컴퓨터의 등장 초기부터 컴퓨터와의 대화 기능에 대해 연구했다. 1968년 마우스와 워드 프로세서의 기능,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컴퓨터를 이용한 회의, 그룹웨어와 같은 개념을 발표했지만 무엇보다 인터넷에서 쓰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개념을 생각해 냈다. 그는 2차 대전 뒤 스탠포드 대학으로 돌아와 인간의 지성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를 연구했고 그 결과 온라인 멀티미디어 시스템의 원형인 NLS(oN Line System)를 만들었다. 그는 돈에 욕심이 없는 엔지니어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마우스는 더그 엥겔바트가 1963년에 고안해 특허를 받았고 공식적으로는 1968년에 마우스가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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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시분할 운영체제 유닉스 첫 버전 공개

시분할 운영체제 유닉스(UNICS, UNiplexed Information and Computer Service)의 첫 버전이 공개되었다. 유닉스는 1960년대 초, MIT와 벨연구소, 제너럴 일렉트릭 등이 참여해 개발한 MULTICS(MULTiplexed Information and Computing Service)가 원조이다. 프로그래머 케네스 톰슨(Kenneth Thompson)과 데니스 리치(Dennis Ritchie), 덕 맥일로이(Doug McIlroy)의 주도로 개발한 유닉스는 여러 사람이 컴퓨터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한 기술을 담은 운영체제로 각 작업마다 일정한 시간을 나눠 처리하는 시분할 기능과 멀티 유저 접속, 다중 작업 등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AT&T 벨연구소는 7년 동안 7백만 달러를 투입했던 MULTICS 프로젝트를 유닉스 개발 직전에 포기했다. MULTICS에 참여한 다수의 프로그래머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켄과 데니스, 덕은 커널과 파일 시스템, 편집기와 컴파일러에 대한 타임 테이블을 작성하고 예정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마침내 유닉스가 탄생되었다.
유닉스는 현재 PDP 기종에서만 수행되고 있으며 AT&T에서도 다른 PDP 시스템에서 실험을 계속할 계획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약 유닉스가 호환성까지 갖추게 되면 컴퓨터의 이용 시간이 많은 대학과 기업의 보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UNIX는 1년 뒤에 붙여진 이름
처음 발표 당시 UNICS라는 이름을 쓰다가 1970년에 UNIX로 이름이 바뀐다.

[1969년] 미 국방성, 4대의 컴퓨터 연결하는 아르파넷 구축
미 국방성이 컴퓨터를 연결하는 아르파넷(ARPANET : Advance Research Projects Agency Network)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4지역의 컴퓨터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아르파넷은 군사전문기관과 국방성 사이의 안전한 통신을 위해 실험적으로 진행된 프로젝트. 아르파넷은 군사 목적을 위한 분산 컴퓨팅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연구되고 있었으며, 아르파넷과 연결된 어느 지역이 폭격으로 시스템이 고장이 나더라도 통신을 할 수 있는 안전한 통신 네트워크다. 최초 설계 당시에는 시스템 자원을 공유뿐 아니라 시스템을 직접 제어하고 데이터베이스에 곧바로 접속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국방성과 연결된 노드는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대학과 UCLA 대학, 스탠포드 대학의 SRI 인터내셔널 그리고 유타 대학 등이다. 아르파넷의 메시지는 컴퓨터를 통해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전송되며 미 국방성은 차후 더 많은 컴퓨터를 연결해 망을 확장해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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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그들을 모이게 했다
아르파넷을 초창기의 인터넷으로 부르지만 연구는 거의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61년 7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레오나르도 클레인록(Leonard Kleinrock) 교수는 ‘대형 통신망에서 정보 흐름(Infomation Large Communication Nets)에서 패킷 교환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임을 밝혔다. 1962년 8월 MIT의 J.C.R 릭라이더(J.C.R Licklider) 교수는 온라인 컴퓨터 통신(Online Man Computer Communication)에서 은하망(Galactic Network) 컨셉을 세운 뒤 그 해 10월부터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서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 뒤 MIT의 연구원으로 있던 로렌스 G.로버츠(Lawrence G.Roberts)는 1965년에 MIT에 있는 TX-2 컴퓨터와 캘리포니아의 Q-32 컴퓨터를 연결하는데 성공한다. 로버츠는 연구 성과를 Multiple Computer Networks and Intercomputer Communication(다중 컴퓨터 망과 내부 통신)이란 제목으로 1966년에 ACM 학회(ACM Symposium)에서 발표한 뒤 이를 정리해 1967년에 6월에 보고했다.
그런데 이 학회에는 영국 국가 물리 연구소(National Physical Laboratory)와 랜드(RAND) 사가 거의 비슷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로버츠는 NPL의 로저 스캔틀버리(Roger Scantlebury)와 RAND사의 폴 배런(Paul Baran)에게 연구에 대해 물은 뒤 서로가 똑같은 연구를 하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버츠는 이들을 만난 뒤 NPL이 제시한 패킷이란 단어를 받아들이고 아르파넷의 전송 속도를 2.4kps에서 50kps로 올려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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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IBM 번들 소프트웨어 공급 중단, 소프트웨어 업체들 일제히 환영

IBM이 컴퓨터 판매와 함께 끼워주던 소프트웨어의 공급을 사실상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컴퓨터 구매 기업이나 연구소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따로 사야 하는 불편함을 겪게 됐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IBM의 이번 조치를 환영하고 있다. IBM이 소프트웨어를 분리해 판매함으로써 이용자들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데다 소프트웨어 산업도 한층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69년] RS-232-C, 표준 통신 포트 채택
RS-232-C가 컴퓨터와 주변기기의 표준 통신 프로토콜로 허가되었다. RS-232-C 커넥터는 25개의 핀을 가지고 있으며, RS-232-C 프로토콜은 컴퓨터와 주변기기가 한 번에 1비트씩 데이터를 연속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통신 규약으로 향후 쓰임새가 많을 것으로 예측된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6 Comments

  1. 2007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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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마우스의 특허권료는..대체 얼마일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_-a.. .

    • 2007년 11월 19일
      Reply

      아.. 실제로 특허료가 지불됐는지는 모르지만, 엥겔바트의 2축 마우스는 사실 특허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형태입니다. 오히려 제록스가 1974년에 특허권을 따낸 커서 포지션 디바이스가 기계식 마우스(볼마우스)의 원형이라 특허권료를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

  2. 2007년 11월 19일
    Reply

    하하하.. 기대하던 포스팅이.. ㅎㅎ
    마우스 사이에 있는 휠이 젤루 편하죠.. ㄷㄷㄷ
    (P.S. 요즘들어 타블렛을 더 쓰기는 한다만..)

    • 2007년 11월 19일
      Reply

      기대가 채워졌는지는 모르겠네요 ^^

  3. 2008년 12월 9일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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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2월 9일 NLS(하이퍼텍스트 시스템과 컴퓨터용마우스)가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The Mother of All Demos’,를 통해 공식 시연됐다.

    당시 그와 함께 하던 연구원들도 이해하기 힘들어했을 정도로 그의 발명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는 이 놀라운 발명품 컴퓨터 마우스에 대한 로열티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그가 만든 이 발명품은 인간과 컴퓨터간 인터페이스, 즉 맨-머신 인터페이스의 가장 중요한 컨셉을 형성한 위대한 발명으로 회자된다. 심지어 그와 함께 연구하던 연구원들도 도망갈 정도였으니.

    이제는 볼마우스에 이어 수직마우스, 광마우스, 레이저 마우스 등등 많은 마우스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할 때 이를 아주 자연스레 받아 들인다.

    하지만 엥겔바트가 마우스를 처음 발명했을 때 그것은 오늘날의 마우스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

    즉 두께 0.5cm 정도되는 한면이 터진 거의 정육면체인 통의 한쪽면에 두개의 금속 원반바퀴가 터져나와 dl rjtdmf 굴ㅣ리는 것으로 인간이 원하는 정보를 컴퓨터에 전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야말로 현대 마우스의 프로토타입(원형)이었다. 이 마우스를 뒤집은 사진을 보면 사각형의 윗쪽 가로로 원판형 바퀴가 하나, 윗쪽 오른쪽 세로로원판형 바퀴가 하나 , 그러니까 ‘기역(ㄱ)자’형으로 각각 x축 y축으로 움직이는 원반이 하나씩 장착되어 있었다.

    <사진에 보면 발명자 엥겔바트의 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wikipedia.org. Engerbart >

    인간과 기계의 인터페이스 도구를 발명한 엥겔바트의 발명 배경에는 철학적 동기가 있다고 한다.

    즉, 엥겔바트는 벤자민 리 월프라는 학자의 언어학적 상관성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학자는 언어제어의 복잡성과 복잡한 사람의 생각 간에 연관성이 있다고 본 셈이다.

    이에 엥겔바르트는 우리의 현재 기술(상황)이 정보조작 능력을 제어한다고 추론했다.

    결국 그는 컴퓨터를기반으로 해 정보를 직접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역할을 떠맡기로 결심했다.

    그의 맨-머신 인터페이스 도구를 개발한 배경에는 이러한 철학적 의미가 숨어있다 .

    이처럼 인간은 기계와 소통하고, 또 인간같은 기계를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대표적인 노력이나 성 과 중 하나는 인간과 같은 로봇의 등장이다.

    하지만 이 나무토막과 원반형 쇠바퀴 두개로 이뤄진 초기 맨-머신 인터페이스 도구 등장 40년은 또다른 생각을 일으킨다.

    즉 인간-기계 뿐 아니라 인간간 인터페이스가 더욱더 아쉬워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술개발사는 어찌보면 자연의 정복과정이기도 하지만 기계를 더욱더 인간스럽게 만들고, 또 기계와 소통화하려고 시도하는 역사였다.

    맨-머신 인터페이스 선구자인 위대한 발명가 엥겔바트의 마우스는 새삼 인간-인간 인터페이스를 생각케 한다.

    해마다 오는 12월 세모가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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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1925.1.30∼)
    약력: 미국 오레곤 출생의 컴퓨터엔지니어.발명가. 컴퓨터 마우스와 하이퍼 텍스트를 발명하다.

    수상: 국가기술 메달, 레멜슨 -MIT상, 튜링상, 러브레이스메달, 노버트 위너상 등을 수상.

    출생: 더글러스 엥겔바트박사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인의 후손인 미국인이다. 그는 컴퓨터마우스 발명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있다.

    기여: 스탠포드연구소(SRI)내에 있던 그의 팀은 하이퍼텍스트와 네크웍트 컴퓨터, GUI 프리커서 등을 개발해 점점 급박해지고 복잡해지는 컴퓨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엥겔바트는 세계 제 2차대전이 발발하자 필리핀에서 해군소속 라디오기술자로서 근무했으며 바네바 부시(인터넷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의 우리가 생각하는 바(As We May Think”)-에 크게 자극받는다.
    전후에 그는 오레곤대에서 전기엔지니어학사를 받고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수년간 박사 연구논문인 스토리지 디바이스를 상업화하기 위해 디지털테크닉스라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수년을 보낸다. 그러다 스탠포드리서치연구소(SRI)에서 마그네틱 로직디바이스개발에 매진하게 된다.

    ▶마우스: 엥겔바트가 최초로 선보인 컴퓨터마우스는 작업면에 직접 접촉되는 바퀴형태의 금속판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같은 기괴하고 이상한(?) 도구를 발명하게 되었을까.

    한 과학역사가에 따르면 엥겔바트가 벤자민 리 월프라는 학자의 언어학적 상관성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월프는 언어제어의 복잡성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의 복잡성을 제어한다고 추론했다. 엥겔바르트는 우리의 현재 기술상황은 정보를 조작하는 능력을 제어한다고 추론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반대로 우리의 새롭고 개선된 기술개발을 콘트롤 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을 컴퓨터를기반으로 해 정보를 직접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역할을 떠맡기로 했다. 또한 개인과 그룹의 지식 작업을 위한 프로세스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엥겔바르트의철학과 연구어젠다는 그가 ‘바이블’이라 부르는 1962년 연구리포트에 담겨 있다.
    실제로 그 이름은 ‘바이블(bible)’: 인간지식 극대화:개념의 틀 Augmenting Human Intellect: A Conceptual Framework)이다.

    이 네트워크를 극대화하는 지능( network augmented intelligence)의 개념은 엥겔바르트의 이 선구자적인 업적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발명주변: SRI에서 엘겔바트는 온라인 개발의 핵심SRI인터내셔널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ARC(ARC:Augmentation Research Center로 엥겔바르트가 sRI에 세운 연구소).는 비트맵스크린, 그룹웨어,하이퍼텍스트,GUI용 프리커서 등 컴퓨터인터페이스요소를 개발했다.
    그의 많은 컴퓨터인터페이스 아이디어를 많은 사람들이 PC개념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용 컴퓨터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배치프로세싱 방식 등 중간단계를 거쳐 사용하고 개인컴퓨터시스템에서의 수직 애플리케이션SW가 쓰여지던 컴퓨터환경에서 개발됐다.

    ▶마우스 발명과 그 가치: 공식 시연 1년전인 1967년 엥겔바트는 나무로 만든 통에 두개의 금속 원반이 있는 마우스에 대해 ‘디스플레이시스템을 위한 X-Y위치표시기( X-Y position indicator for a display system)’란 이름으로 특허를 신청하고 70년에 이에대한 특허권(computer mouse U.S. Patent 3,541,541 )을 확보하게 된다.그는 나중에 그 꼬리가 끝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것의 별명을 ‘마우스(mouse)’로 불렀다고 밝혔다. 그의 팀은 또한 온스크린 커서를 ‘버그’라고 불렀지만 이 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명에 대해 어떤 로열티도 받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의 특허가 PC혁명이 입력도구를 필수적인 도구로 만들기 전인 1987년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후속 마우스가 원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니에서 다른 메커니즘으로 마우스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엥겔바트는 한 인터뷰에서 SRI가 마우스특허를 확보했지만 그들은 그 아이디어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다. 몇년후 그들은 이 특허를 애플에게 4만달러에 라이선싱했음을 알게 됐다”고 기억했다.

    ▶아파넷(ARPANET): 엥겔바트의 온라인협동작업과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위한 온라인 협동작업을 위한 연구와 도구 개발비용의 일부는 미국 방부 고등계획국(ARPA)에서 댔으며 SRI의 ARC는 아파넷개발에 참여한다. 1969년 10월 29일 세계최초의 전기컴퓨터네트워크인 아파넷이 UCLA 의 레오나드 클라인록의 연구소와 SRI의 엥겔바트연구소 간에 설치됐다.
    양쪽사이트의 인터페이스 메시지프로세서(Interface Message Processors)가 최초의 인터넷 백본으로 역할을 했다.
    SRI와 UCLA에 이어 UCSB,유타대도 초기 오리지널 네트워크 노드의 부분이었다. 12월5일까지 전체 4개의 노드가 연결됐다.
    ARC는 곧 최초의 네트워크 정보센터가 되었고 모든 아파넷노드를 연결하는 디렉토리를 운영하게 됐다.

    2008년 6월 19일 서울 메리어트 호텔에 IT리더스 포럼 조찬회 강연자로 나선 빈트 서프 박사(구글 부사장,최고인터넷전도사 Chief Internet Evangelist)도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컴퓨터 2대간 네트워크는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3대로 통신네트워킹은 불가능했는데 그들의 그룹이 성공시켜서 이를 미국방부고등계획국(ARPA) 국장에게 그림을 그려 개념을 소개하고 알리면서 이들의 지원을 받아 오늘날의 인터넷 표준화가 이뤄지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엥겔바트 연구소 주변: 엥겔바트 주변의 많은 연구원들이 부분적으로는 그와 컴퓨터미래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제록스팰러앨토 (Xerox- PARC: Palo Alto Research Center) 내에서 그가 운영하던 연구팀을 떠났다.

    그는 시분할 컴퓨터에서 미래를 보았는데 그에 대해 젊은프로그래머들은 개인용컴퓨터를 위해 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는 시분할컴퓨텅이 가능한 시간에서 온 사람이었고 또한 합동연구를 믿었던 사람이었다. 젊은 프로그래머들은 중앙집중화 파워를 매우 의심스러워하던 시대의 사람이었고 개인용컴퓨터가 거의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SRI의 운영진들은 인공지능연구원 베르탕 라파엘의 휘하로 ARC의 연구를 넘겼는데 팀셰어(Tymshare)라는 회사로 넘기는 문제를 논의했다.

    팀셰어는 NLS와 개발자 및 연구성과를 넘겨받아 NLS에 기반한 상업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팀셰어는 이미 NLS와 비슷해져 있었고 오피스 1이라는 마이크로컴퓨터상에서 운영되는 자체 SW카피 실험을 ARC와 공동 수행했다. 자신이 밀리고 있는 것을 감지한 엥겔바트는 1986년 맥도넬을 끝으로 회사생활에서 은퇴한다.

    ▶위대한 발명의 인정: 1980년대부터 유명한 개인과 조직들이 엥겔바트의 기여에 대한 독창적인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의 위대한 발명에 대한 찬사와 상이 잇따라 수여된다.

    1995년 12월 보스턴에서 열린 제 4차 WWW(World Wide Web)컨퍼런스에서 그는 유리 루빈스키기념메달로 명명되는 상을 받는다. 1997년 세계최대의 발명개혁 관련 상인 레멜슨­MIT상과 50만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2000년 초 엥겔바트는 기술및 재정지원자들로 엥겔바트 컬로퀴엄 또는 미완성 혁명­II 를 만든다. 2000년 12월 빌클린턴은 그에게 미국 최고의 국가기술메달을 수여한다. 2001년에는 영국컴퓨터학회의 러브레이스메달을 수상하며, 2005년에는 컴퓨터역사박물관 펠로우가 된다.그리고 노버트위너상의 영예와 함께한다 이는 컴퓨터전문가의 사회적 기여를 기리기 위해 매년 수여하는 상이다.
    2008년으로 83세가 되는 그는 새로운 책인 “진화하는 집단지성(Evolving Collective Intelligence)”라는 책의 베타버전을 냈는데 그가 발레리 랜도, 아이린 그레그와 함께 쓴 책이다.
    그는 집단IQ라는 철학을 증진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5년 그는 국가과학위원회(NSF) 로부터 오픈소스 하이퍼스코프 프로젝트 펀드를 받았다. 이 프로젝트는 Ajax와 DHTML을 사용해 오그멘트의 멀티플 뷰잉 및 점핑능력을 재생하기위해 브라우저 컴포넌트를 만들었다.하이퍼스페이스는 엥겔바르트의 목표와 연구의 개발에 기반한 리서치협력소프트웨어와 서비스 및 집단대화중인 더넓은 커뮤니티에 개입하도록 디자인된 프로세스의 첫번째 단계로 인식되고 있다.
    ▶마우스의 진화
    처음에 마우스는 네모난 나무상자 안에 두개의 원형바퀴를 장착했으나 이후 발전하여 이제는 ‘허공에 대고 쓰는 마우스’ ‘점토 마우스’ ‘무선마우스’ 등이 등장했다. 최근엔 공중에 대고 사용하는 마우스가 나오는가 하면 친환경 재질인 점토로 개발된 제품들도 등장했다.
    처음에 발명된 이 컴퓨터용 입력기기를 보고 엥겔바트 연구소 직원들이 “한 개의 붉은색 버튼이 있고 뒤편으로 선이 나와 생쥐 같이 생겼다”고 해서 마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98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바닥에 볼(ball)을 굴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나는 커서를 움직이도록 만든 볼마우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근래 많이 사용된 롤링 볼 방식은 1982년 세계적인 마우스 개발업체인 로지텍이 첫선을 보인 제품이다.
    이후 마우스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다. 1991년 로지텍은 왼손잡이용 마우스맨, 작은 손의 어린이를 위한 키즈마우스를 선보였다. 트래킹 방식도 볼 일변도에서 벗어나 광 마우스, 레이저 마우스로 발전했다. 연결방식도 PS/2포트에서 USB 및 무선 등으로 변화했다.
    2004년 로지텍은 세계 최초로 레이저 트랙기술을 채택한 마우스를 개발한다. 마우스 패드를 깔고 사용해야 했던 기존 한계를 뛰어넘어 책상이나 바닥에서도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 제품이었다.
    최근의 마우스는 노트북PC의 확산 추세를 반영, 노트북용 마우스는 물론 △어디서나 사용이 자유로운 에어 마우스 △연필을 잡듯이 수직형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우스 △물에 젖어도 고장나지 않는 마우스 △거인도 편하게 잡을 수 있는 개인 맞춤형 마우스 △말랑말랑한 점토재질의 친환경 마우스 등으로 다양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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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모모습을 보시려면

    http://sloan.stanford.edu/MouseSite/ 1968ㅇ드ㅐ.ㅗ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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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12 09

    hallasanda

    -compiled mainly from wikipedia, IT Leaders’ Forum Report

    • 칫솔
      2008년 12월 9일
      Reply

      좋은 내용입니다만, 다음에는 트랙백을 이용해 주세요. 글이 너무 길어서 다른 댓글까지 안뜹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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