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링크가 포함된 흥미로운 메일을 하나 받았다. AMD CMO인 나이젤 디소의 블로그 글을 링크한 메일이었다.
http://blogs.amd.com/nigeldessau/2009/04/10/the-future-of-mainstream-notebook-pcs/
‘주류 노트북 PC의 미래'(The Future Of Mainstream Notebook PCs)라는 제목의 이 글은 지난 3월 말에 국내에 소개된 HP 파빌리온 DV2를 둘러싼 노트북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글 시작에 밝혔듯이 아마도 그가 파빌리온 DV2를 들고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녔을 때 몇몇 여행객들이 이 노트북을 ‘넷북’이거나 ‘값비싼 휴대 노트북’으로 나누는 것을 보고 이 글을 썼을 게다. 한국도 다녀갔는지는 모르지만, 국내에서 진행된 HP DV2 발표회에서도 똑같은 문제 제기가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적지는 않고 때마침 필요한 이야기를 한 셈이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 원인은 분명 잘못 파악하고 있다.
지난 3월30일에 있었던 HP DV2 발표회는 AMD에겐 매우 의미 있는 행사였다. AMD가 초소형 노트북을 겨냥해 만든 유콘 플랫폼-CPU를 비롯한 각종 컨트롤러의 모음-을 넣은 야심작이 한국에 첫 선을 보이는 날이었으니까. 이 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HP DV2였지만, AMD도 멋진 조연으로서 대우 받을 만했고, 이날 AMD의 한국 지사는 짧은 시간이나마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DV2 소개에 앞서 먼저 마이크를 잡은 것은 AMD 코리아의 기술이사였다. 그가 설명한 것은 유콘 플랫폼의 전략과 구성, 성능의 차별성 등이었다. 유콘이 인텔 아톰의 대항마로 불려온 터라, 그런 구도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유콘은 넷북과 주류 노트북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저전력, 고성능(?) 플랫폼이다. 전체 노트북 시장 중에 아직 크게 활성화되지 않은 틈새 시장을 파고 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AMD의 전략 무기인 것이다. 넷북보다 전력은 더 먹어도 고성능이고, 일반 노트북보다는 성능은 낮아도 저전력인 구성으로 넷북보다 크고 노트북보다 작고 가벼운 제품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값도 넷북과 주류 노트북 사이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콘 플랫폼을 내세운 AMD의 노림수다.
12인치 안팎의 750~1천 달러 미만 울트라 포터블 노트북은 분명 전망이 있어 보인다. (브랜드 프리미엄이 붙긴 해도)소니 바이오 TZ처럼 비슷한 폼팩터의 인텔 코어2 칩셋으로 만든다면 150만 원이 훌쩍 넘길 만큼 비싼 제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때문에 TDP 15W의 단일 코어 애슬론 또는 셈프론 프로세서에 720P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는 수준의 내장 그래픽 또는 3D 성능을 강화한 HD3410 외장형 그래픽으로 얇고 가벼우면서 성능도 받쳐주는 울트라 포터블 노트북 시장을 건드리려는 AMD 계산은 크게 틀린 답안은 아닌듯 보인다.
문제는 소비자가 이러한 특징을 바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부류의 제품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모른다. 이제 막 나온 플랫폼이라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지 그 이름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않고 플랫폼 자체를 강조하는 듯한 인상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 제품, 상표에 이르기 까지 이름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AMD는 언제나 의미를 담은 쉬운 이름 짓기에 실패하고 있다.
그 범주를 지칭하는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인텔이 1년 전에 발표한 ‘넷북’과 ‘아톰’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넷북은 ‘성능은 강하지 않으면서 가볍고 작은 PC’로 이해하고 있다. 발표 초기, 업계는 물론 수많은 소비자들은 노트북이면서 노트북이 아니라는 넷북에 심한 혼란을 느꼈으나 줄기차게 넷북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함으로써 지금은 엄연히 노트북과 다른 컨셉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넷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제품이 쏟아진 덕에 소비자들이 좀더 쉽게 이해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넷북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미리 정의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각에도 넷북과 같은 초소형 노트북 컨셉에 관해 업계는 물론 소비자들의 혼란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인텔의 전례를 AMD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인텔이 업계와 소비자에게 넷북을 제안했지만, 이는 분명 인텔의 전유물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넷북을 살 때 자연스럽게 인텔판 넷북을 찾는다. 인텔은 아톰 프로세서를 출시하면서 이것이 넷북 시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졌고, 아톰 프로세서를 넣은 수많은 신형 넷북이 소개되면서 아톰과 넷북, 인텔은 거의 동일시되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넷북’은 노트북의 한 범주를 가리키지만, 실제는 인텔의 브랜드처럼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AMD는 넷북에 썼던 인텔의 방법, 이를 테면 유콘을 통해서 만들고 싶은 노트북 시장의 범주에 대한 메시지를 확실하게 던질 수 있는 이름을 정하는 것이 급하다. 넷북 아니면 노트북 사이의 울트라 포터블 노트북에 대한 범주를 가리키는, 누구나 부르기 쉽고 친근한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인’이 박힐 만큼 들어도 부담 없는 이름을 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니 노트북’처럼 짧고 쉬운 이름을 통해 그 범주의 노트북을 만드는 업계의 지원과 그런 노트북을 찾는 소비자를 한데 묶어 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개똥이’, ‘소똥이’라 불리는 것은 그 노트북을 만드는 업체나 이것을 갖고 다니는 소비자들에게도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 나이젤 디소 CMO 역시 넷북과 노트북 사이의 범주에 대한 확고한 이름이 없으니 지금처럼 긴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쉬운 점은 AMD가 이에 적극적인 자세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 “울트라 포터블이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나이젤 디소 CMO도 비슷한 주장이다. 그런 AMD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개콘 버전으로-그저 “그건 니 생각이고~”뿐이다. PC를 모르는 소비자조차 넷북을 알고 아톰을 이야기 하는 게 그저 홍보를 잘해서가 아니다. 거부감 없는 단순한 이름이 가져다 준 결과다. 그 이름이 수많은 매체와 소비자의 입에 오르고 내리니 관련 업계도 이들의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아톰을 넣은 넷북을 더 많이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넷북은 그 이름 그대로 브랜드 파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넷북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노트북들이 제법 좋은 성적을 거두다 보니, 오죽하면 12인치 노트북을 넷북이라고 우겨가면서 파는 말도 안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지 않나.
AMD는 유콘을 내놓으면서 이미 형태와 가격은 확실하게 메시지를 던졌다. 12인치 안팎의 얇고 가벼운, 700~1천 달러 미만의 노트북이라는 것. 이제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이름 하나만 있으면 된다. 새로운 제품과 시장의 범주를 만들어 지위를 확고하게 다지고 싶은 AMD의 컨셉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업계와 소비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을 내세워 지속적인 메시지 전달할 때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입사 1순위로 괜찮은 작명가부터 뽑는 것이 어떨까?
덧붙임 #
– 사실 맨 처음 인텔이 설명한 넷북은 지금과 달랐다. 인텔은 지난 2008년 4월 3일, 상하이에서 열린 인텔 개발자 포럼에서 2세대 클래스메이트 PC를 선보이며 ‘넷북’이라는 컨셉트를 공식 발표했다. 인텔은 “2세대 인텔 기술력으로 구현되는 클래스메이트 PC는 저렴하면서 완벽한 기능을 가진 견고한 인터넷 중심 컴퓨터 플랫폼이다”고 클래스메이트 PC가 가진 넷북 컨셉트를 정의한 뒤 “사용이 간편한 이 PC 제품은 무선 기능, 더 길어진 배터리 수명, 액체유입 방지 기능을 갖춘 키보드가 특징이며, 떨어뜨렸을 경우를 대비한 충격 방지 기능이 더욱 강화된 것”이라고 넷북의 주요 특징을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몇몇 특징이 바뀌었고, 주요 판매 시장의 소비자 성향에 맞춰 컨셉이 수정되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미니북정도가 좋겠네요^^
미니북~ 좋은데요. ^^
클래스메이트는 eeePC에 대항하기 위해 인텔에서 급조한 사양아니었나요?
아무튼 확실히 브랜드 네이밍에서는 인텔이 앞서는 느낌입니다.
intel inside 때 부터 상당히 광고를 이용하여 지지도를 얻어 왔으니 말이죠.
유콘보다는 유니콘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죠 ㅋ
음.. 넷북을 깔아 뭉갤만한 멋진 이름 콘테스트 이런걸 AMD에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초기에 나온 건 OLPC의 대항형태라도 봐야하고요. 2세대는 넷북 컨셉을 확실히 담아서 보여준 것이니 차이가 좀 있지요. 클래스메이트는 이미 지난 해 3세대가 나온 상황입니다만..
인텔이 잘하는 것은 확실히 브랜딩이지요. AMD가 그짓만 잘해도 ‘거지꼴’은 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매니아 분들 농담인거 아시죠?)
대중의 접근성을 생각한다면 ‘이름’도 무시 못하죠. 부디 간과하는 일이 없길;;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
그렇죠. 쉬운 이름에 멋지고 친근한 외모라면 받아들이기 쉽잖아요~ ^^
정말 공감합니다
AMD 작명센스 정말 제로인듯..
그러게요. 이런 저런 마케팅하지 말고 이름이나 잘 지어 퍼뜨렸으면 좋겠어요~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물이 이름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름이 사물을 정의하기도 하는 법이죠.
어머.. 그 표현이 있었군요~ ^^;
칫솔님 좋은글 자주 읽으면서 이제사 인사드립니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공감가는 글들이기에 사이트에 자주 링크하고 있습니다. 혹 실례가 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칫솔님의 좋은글로 IT에 대한 생각을 넗혀나가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테크브리핑님. 처음 뵙습니다. 제가 찾아가서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댓글로 먼저 인사를 주시니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오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결국 1인자와 2인자의 차이는 1인자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시장을 창출하는 거라면, 2인자는 타의 반 자의 반 그대로 끌려가는 셈이라고 할까요… 물론 인텔이 꽉 잡고있는 프리미엄 시장과 넷북 시장의 틈새를 노리려고 하고 있지만, 예전 기억들을 되살려보면 또 사람들이 유콘이 뭐하는 건지 모르고 지나갈 확률이 높아보이네요…
그러고보니 비아의 나노 플랫폼 역시 프로세서의 성능 면에서는 초기 아톰보다는 좋았던 것 같았는데요… 업체와 고객의 무관심속에 묻혀버려가는 것 같네요…
모든 시장이 1등 사업자를 따라가거나 눈치는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만, 2등 사업자의 모험이 없으면 재미가 없지요~
그나저나 AMD도 플랫폼에 집착하기보다 그 시장에 집중하기를 바란답니다. 말씀하신 대로 플랫폼은 사라지지만, 시장은 더 오래가거든요. ^^
AMD 작명 센스야…듀얼코어 에슬론x2 시리즈 이후론 뭐 안드로메다로 가셨죠;;;
참 간만에 와보네요;; 인터넷이 무쟈게 비싼동네라 사진 많은 사이트는 오기가 두려워서..ㅠㅠ
그러게요. 센스가 넘치는 조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고 계신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