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CES’에 대한 단상

1. ‘한국 전자IT산업융합 전시회’. 대체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이런 이름을 걸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놀라워서. CES라는 이름은 CTA와 협의하지 않는 이상 쓸 수 없는 것은 이해하나, ‘한국 전자IT산업융합 전시회’라는 이름에서 어떤 정체성이 느낄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참 부르기도 어려운 이런 행사명은 어떻게 지었을까?

2. 행사 이름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른바 ‘동대문 CES’라는 별칭을 가진 이 행사는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급조한 모양새가 보기 좋을 리 없다. 다만 필요한 이유가 더 많다.

먼저 시기다. 우리는 새해마다 CES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소식을 보고 듣지만, CES의 제품과 기술을 국내에서 직접 보고 평가할 기회가 없었다. 많은 기업과 기관, 그리고 언론은 1월과 2월 말까지 CES와 MWC 등 외국 전시회에 집중하는 터라 이 시기에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는 꺼리기 마련. 그런데 이처럼 작은 행사를 통해 제품과 기술을 공유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은 좋은 시도다.

LG전자의 롤러블 TV ‘LG 시그니처 올레드 R’. (첫 날 전시 이후 철수한 상황이다)

둘째, CES나 MWC가 끝나면 곧바로 분위기가 가라 앉는다. 뉴스의 짧은 지속 시간을 감안하면 CES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제품이나 기술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도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CES와 MWC 중간에 이러한 행사는 말로만 듣던 제품과 기술에 대한 체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대감을 지속시키는 한편 행사를 다녀간 이들에게 그 여운을 더 오래 남겨 둘 수 있다.

셋째, CES에 나갔던 국내 기업 중 일부지만, 그래도 한 자리에 모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당연한 말인 것 같을 텐데, CES에 갔던 경험이 있다면 당연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CES에서 모든 한국 업체를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 그곳에 취재하러 간 기자들조차 모든 한국 부스를 보고 돌아가지 못한다. CES에 나가는 기관이나 업체마다 따로 부스를 만들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CES는 너무 넓은 곳에서 진행되고 찾아갈 시간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제품을 모아 놓은 이번 동대문 CES는 너무 편한 행사인 셈이다.

네이버의 원격 로봇 ‘엠비덱스'(AMBIDEX)

넷째, CES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아니지만, 이 행사는 동대문을 지나가는 누구나 기술, 제품을 보고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3. 때문에 동대문 CES는 대규모 전시회로 열 필요가 없다. 새로운 제품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도 아니고 대규모 계약 상담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CES에 출품했던 제품과 기술 위주로 전시하는 것인 만큼 쇼케이스 정도의 분위기면 충분하다. 실제로 이번 동대문 CES는 쇼케이스에 가깝다. 작은 행사라는 컨셉트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이 행사는 ‘한국 전자IT산업융합 전시회’ 같은 ‘공무원’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소비자 기술 쇼케이스'(consumer technology showcase) 정도면 딱이다 싶다. 줄여서 CTS.

부스 디자인은 행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획일적인 부스 구성으로 성의가 없어 보인다.

4. 문제는 쇼케이스에 맞는 부스의 구성이다. 특히 부스 디자인은 정말 문제. 삼성, LG, SK텔레콤, 네이버처럼 통장이 넉넉한 곳은 자체적으로 분위기를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은 결국 기관의 도움으로 부스를 차려야 하는데 모든 부스가 획일적이다. 부스 공간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하얀색 벽으로 3면을 세운 획일적 부스는 CES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다.

이런 획일적 부스 디자인은 CES나 MWC에 제품과 기술을 내보내고 있는 한국관마다 매번 지적 당하는 문제다. 더구나 외국 전시관에 비해 한국 전시관의 형편없는 디자인과 빼곡한 정보를 담은 포스터를 벽면에 붙이는 건 해마다 지적하는 문제임에도, 행사를 진행하는 기관들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귀담아 듣지 않는다. 혹시 동대문 CES를 보고 온다면 이 문제는 계속 지적해 주시라. 부스 디자인과 전시 방법만 바꿔도 이 행사는 더 멋있을 것이다.

오비이랩의 뇌건강 측정 장치. 근적외선 신호를 측정해 머리속 산소포화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치매 예방이나 스트레스를 진단하는 장치다.

5. 삼성, LG, SK텔레콤, 네이버 부스는 역시 크고 화려하다. 당연히 볼거리도 많다. 롤러블 TV, 맥주를 만들어주는 홈브루, 마이크로 LED TV, 디지털 콕핏, 로봇 등.

하지만 나는 좀더 작은 곳을 가보길 권한다. 머리에 쓰면 뇌의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오비이랩의 뇌영상 장치와 기술도 볼만하고, 360도 전후방 촬영을 할 수 있는 넥밴드 카메라인 피트 360, 뱃속 태아 사진만으로 태어날 아기의 3D 모습을 미리 보는 알러뷰, 지문 인식 OTP 카드, 아주 간단하게 정자 상태를 확인하는 오뷰M, 스마트폰만으로 움직임을 매칭시키는 키네틱, 가상 현실의 느낌을 온몸으로 전달하는 비햅틱 등 우리 일상이나 앞으로 만나게 될 여러 기술과 제품을 찾아보고 즐길 수 있다.

넥밴드형 360도 감시 카메라인 피트360(Fitt 360).

6. 혹시 지나가던 길이라도 동대문 CES를 들른다면 그곳에 제품과 기술을 가져온 이들에게 물어보시고 이야기를 나누길. 제품에 대해 묻고 CES의 경험을 간접이나마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CES에서 지친 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덧붙임 #

안타깝게도 LG 롤러블 TV는 첫날만 전시한 뒤 곧바로 네덜란드 전시를 위해 철수했다고 한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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