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리얼리티 프로가 아이폰 모먼트를 재현하지 못한다 해도…

아마도 한 달 뒤면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질질 끌어왔던 소문 하나가 더 이상 소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듯하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수년 동안 물밑에서 준비해 온 애플 XR 헤드셋이 곧 있을 WWDC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라서다.

애플 XR 헤드셋의 정식 이름은 아직 확정되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아무리 유력한 이름이라도 공식 발표되는 정식 명칭은 여러 소문 속 가칭과 달랐던 때가 여럿 있었던 탓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얻은 이들로부터 전해진 리얼리티 프로라는 이름도 애플을 통해 정식 명칭으로 확인되기 전까진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지난 해 12월에는 리얼리티OS에서 xrOS로 헤드셋 OS 이름을 정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 역시 공식 발표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많은 것이 불분명함에도 혼합 현실(Mixed Reality) 헤드셋인 리얼리티 프로로 예상되는 애플 XR 헤드셋을 보는 시각은 기대반 우려반인 듯하다. 애플 XR 헤드셋을 기대하는 쪽에선 애플의 참여에 기댄 XR 시장 확대를, 우려하는 쪽에선 아이폰 모먼트 수준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쪽으로 갈리고 있다. 전자는 애플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더라도 일단 시장 참여 만으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것이라는 것이고, 후자는 과거 아이폰이 바꿔 놓은 휴대 컴퓨팅 생태계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불안을 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리얼리티 프로가 아이폰 모먼트를 재현하는 건 어려워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서 후발 주자라는 이유는 제외해야 할 듯하다. 비록 XR 헤드셋 시장에서 두각을 보인 건 오큘러스를 흡수해 오랫 동안 시장을 만들어 온 메타, 고성능 비즈니스 분야를 공략해 온 HTC 바이브, 중국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으로 확장하는 피코, 초거대 유통 플랫폼을 앞세운 밸브 인덱스 등이 있지만, 아직도 생태계 성장 가능성이 높고 혼합 현실로 전환하는 시점을 감안할 때 MR 헤드셋을 내놓는 애플을 후발 주자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어 보여서다. 무엇보다 자체 시장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애플에게 있어 후발 주자라는 게 큰 장애 요소라고 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 모먼트의 재현이 어려운 것은 애플 리얼리티 프로가 아이폰과 같은 생태계 전략을 쓸 수 없는 여건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소문으로 알려진 리얼리티 프로의 제원과 예상 가격, 이용 대상을 고려할 때 아이폰에서 썼던 전략과 전혀 다른 방향이라서다.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휴대 컴퓨팅 장치 생태계로 바꾼 것은 그 이전까진 생소한 생태계 개념을 빠르게 구축하기 위한 전략을 펼친 때문이지만, 리얼리티 프로는 그런 길을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디 인포메이션이 추정했던 애플 리얼리티 프로 예상도

일단 예상되는 애플 리얼리티 프로의 제원은 바르요(Varjo)나 파이맥스 등 일부 고화소 XR 헤드셋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XR 헤드셋보다 나은 제원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애플 전문 저널리스트인 블룸버그 마크 거먼을 비롯한 여러 주장을 종합한 애플 MR 헤드셋 리얼리티 프로의 추정 제원은 아래와 같다.

디스플레이 | 눈당 4K 마이크로 OLED
시야각(FoV) | 120도
프로세서 | 애플 실리콘으로 추정되는 5nm 칩 2개
배터리 | 2시간 작동, 허리에 장착하는 핫스왑 배터리
패스스루 | SK하이닉스에서 제작한 맞춤형 고대역폭 메모리 포함 ISP 칩
오디오 | 에어팟 프로 및 에어팟 모델의 초지연 연결을 위한 H2 칩
컨트롤러 | 별도의 컨트롤러 없이 손추적 기본
시력 보강 렌즈 | 안경 착용자를 위해 자석으로 부착하는 맞춤형 렌즈 가이드 제공
IPD | 동공간 거리를 전자식으로 자동 조절
시선 추적 | 동공 추적 렌더링을 위해 눈당 최소 1개의 카메라 사용
얼굴 및 신체 추적 | 내외부 12개 카메라로 얼굴 표정 및 다리 움직임 포착
룸 트래킹 | 단거리 및 장거리 라이다 스캐너를 통한 3차원 매핑
외부 재질 | 알루미늄, 유리, 탄소섬유 등을 사용
프레즌스 디스플레이 | 착용자의 눈동자를 표시하는 외부 디스플레이
전용 패스스루 스위치 | VR과 패스스루 조절
헤드스트랩 | 스피커를 내장한 애플 워치 스포츠 밴드 재질과 유사

이처럼 얼핏 봐도 어마어마한 예상 제원을 갖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는 지금까지 출시된 XR 헤드셋 가운데 거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가장 높은 해상도의 디스플레이와 가장 강력한 처리 장치, 공간 추적을 위해 많은 카메라와 센서를 모두 넣은 헤드셋은 어쩌면 모두가 바라던 요소를 갖춘 XR 헤드셋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담은 제품을 얻는 데 따르는 대가도 큰 것이 세상 이치다. 예상 제원 중 일부 변경은 있겠지만, 디스플레이와 프로세서, 카메라와 센서 등을 모두 갖춘 리얼리티 프로의 예상 출시 가격은 3천 달러-세금을 더한 다음 애플 환율을 곱해 원화로 환산하면 450만 원 이상-에 이를 수도 있다. 애플이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을 갖는다면 덜 사악한 가격표를 볼 수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

제조사가 좋은 제품을 내놓고, 합당한 값을 받는 걸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그런 결정에 따른 결과도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문제는 누가 봐도 비쌀 것으로 추정되는 리얼리티 프로가 아이폰처럼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가능성을 가진 제품이 되긴 힘들다는 점을 유추하는 것도 어렵진 않다는 점이다. 초기 모바일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장치 보급을 염구에 둔 혁신적인 가격을 결정했던 아이폰과 다른 방향성이다. 모바일 생태계를 바꾼 아이폰 출시 순간과 대조적인 결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문처럼 진짜 그 가격에 나오는 것을 가정할 때 애플은 왜 이렇게 비싼 제품을 내놓으려는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까지 염두에 둔 XR 시장의 한계와 리얼리티 프로 같은 장치가 가져야 할 방향성 설정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할 것 같다.

일단 XR 헤드셋 시장의 대중적 생태계는 메타가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하긴 힘들다. 마치 아이폰이 그랬던 것처럼 XR 대중화를 위해 누구나 충분히 접근 가능한 299달러에 판매했던 퀘스트2는 2020년 가을 출시 이후 2022년 말까지 거의 2천만 대 이상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XR 대중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기업과 교육 시장을 겨냥했던 메타 퀘스트 프로

하지만 퀘스트2는 많이 보급됐어도 이 장치를 보는 관점이 극히 제한됐다. 확실히 퀘스트2는 값싼 XR 하드웨어인 점은 인정하나, XR 게이밍 장치에 더 가까웠다. 대중성을 고려한 최소의 하드웨어 구성은 잘 먹혀 들긴 했어도 기업이나 교육 등 그 이외의 활용은 매우 취약했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더 진화한 제원에 가격도 높인 퀘스트 프로의 판매량이 극히 저조한 건 그냥 가격이 비싸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시장으로 이동할 만한 기업이나 교육 기관의 활용도가 낮았던 것을 이유로 삼을 수 있다.

때문에 애플이 당장 대중적인 XR 장치를 내놓을 게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대상을 좁히고 이에 맞는 컴퓨팅 장치로써 방향을 잡는 것이다. 대중적인 XR 컴퓨팅 하드웨어를 목표로 했음에도 대중적인 XR 게이밍 하드웨어라라는 어긋난 결론을 얻은 메타와 다르게, 애플은 비록 적은 대상이기는 하나 선택이 명확한 고성능 XR 컴퓨팅 하드웨어라는 방향을 먼저 잡는 쪽을 선택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맥이나 아이폰, 아이패드 등 고품질 게임 개발사와 친화력이 썩 좋다 말할 수 없는 애플에게 게임에 기반한 대중성 보다 역시 충실한 이용자 확보가 더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기에 애플은 리얼리티 프로를 컨트롤러 없이 손을 이용한 조작과 초기부터 부족한 전용 3D 앱에 의존하지 않고 2D 기반 아이패드 앱의 실행에 초점을 맞춘 것일 수도 있다. 게임에 초점을 두면 컨트롤러를 배제할 수 없는 데다, 2D 기반 아이패드 앱의 실행은 터치 기반의 앱들을 아이패드 만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다중 화면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컴퓨팅 장치라면 어떨까? 두 손을 인터페이스로 최대한 활용하고 공간 컴퓨팅이 가능한 XR 헤드셋에서 기존 평면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려는 리얼리티 프로의 방향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애플이 이 방향으로만 고집을 피우진 않을 것이다. 처음에야 부품 공급망과 제조의 한계로 리얼리티 프로를 비싸게 내놓을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부품을 줄이고 설계 최적화를 통해 제조 단가를 낮출 것이고, 좀더 싼 제품을 출시하고 더 많은 이용자를 만나면, 결국 공간 컴퓨팅에 맞는 앱과 콘텐츠를 준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시점이 언제 올지 시간의 문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더라도 애플 리얼리티 프로가 모든 XR 컴퓨팅 생태계의 그림을 통째로 바꾼 순간의 제품으로 평가받게 될 지 미지수다. 애플 생태계 안에서 진화한 새로운 컴퓨터라는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아이폰 출현 때와 달리 이미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는 XR 헤드셋과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 프로가 XR 헤드셋을 차세대 컴퓨팅 장치라는 인식을 심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비록 팀 쿡 시대의 애플이 만들어 낸 새로운 컴퓨팅 장치라는 의미보다, 아직은 낯선 공간 컴퓨팅이라는 개념이 좀더 빨리 확산되고 뿌리내리게 한다면 아이폰 모먼트는 아니라 해도 충분히 그 가치는 증명하고도 남을 것 같아서다.

덧붙임 #

한국 시간으로 6월 6일 새벽에 진행된 WWDC 23에서 애플은 혼합 현실 헤드셋을 비전 프로(Vision Pro)라는 명칭으로 공식 확정했습니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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