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상 현실하고 다른 게 뭐에요?”
마이크로소프트의 혼합 현실 장치를 맞딱드렸을 때 이 질문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도 모르겠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혼합 현실 장치라고 주장하는 MR 헤드셋들을 누가 봐도 가상 현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아서다. 이에 대한 답은 이렇다. 맞다. 가상 현실 장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마이크로소프트판 가상 현실 장치’가 혼합 현실 헤드셋이다.
하지만 한국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 장치가 가상 현실 장치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혼합 현실은 가상 현실과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다른 ‘개념’이라는 게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장이다. 사실 이 말은 틀린 게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동안 주장해온 혼합 현실은 가상 현실을 가리키는 게 아닌 것은 맞다.
그러면 혼합 현실 장치를 접한 우리나라 미디어들은 왜 혼합 현실을 가상 현실로 혼동하거나 이해하는 것일까? 이는 15일에 강남 잼투고에서 진행한 혼합 현실 플랫폼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자리에서 설명했던 내용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가 줄곧 주장해 온 혼합 현실은 마케팅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술적 용어도 아니다. 이는 개념에 가깝다. 증강이나 가상 현실 같은 시각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작업 환경을 구현하는 개념이다. 비록 증강 현실 환경과 가상 현실 환경은 장치의 유형이나 인터페이스는 다르더라도, 서로 다른 공간에서 하던 작업이나 결과를 동일한 시간에 이용자가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미 가상 현실 내에서의 협업은 페이스북 스페이스나 엔비디아 홀로데크, 시스코 webEX VR 같은 도구나 서비스가 이미 출현하고 있지만, 증강과 가상을 혼합하는 것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해 컴퓨텍스에서 두 시각 현실 장치를 가진 디자이너의 협업을 혼합 현실의 예로 보여준 바 있다. 데스크톱에서 하던 3D 디자인을 증강 현실 장치인 홀로렌즈로 가져와 입체 모델로 띄운 뒤 이를 다른 가상 현실 장치를 가진 다른 이용자와 공유하고 검토하면서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다른 시각 현실 사이에서 작업 과정과 결과라는 교집합 부문을 공유함으로써 두 현실을 융합해 더 유연해진 컴퓨팅 환경을 구성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이상의 시각 현실을 좀더 쉽게 섞어 혼합 현실을 구현하는 데 있어 마이크로소프트는 처음부터 이 개념을 적용한 단일 플랫폼과 하드웨어를 갖추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증강과 가상 현실을 위해 각각 따로 운영하는 기존 플랫폼에서 공통점만 추려 적용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다른 두 시각 현실을 이어줄 수 있는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배포, 이를 다룰 수 있는 단일 플랫폼을 채택한 두 가지 다른 하드웨어를 내놓기로 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먼저 윈도 10을 혼합 현실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미 윈도 10 장치에서 실행하도록 만든 유니버설 응용 프로그램을 혼합 현실에서도 활용하는 동시에 그 개발 환경을 시각 현실에서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해 부담을 없앤 것이다. 비록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는 다르더라도 윈도 10 기반 증강 현실과 가상 현실 장치라면 두 가지 현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것이다.
윈도 10을 혼합 현실 플랫폼으로 확대 설계한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에 필요한 증강과 가상 현실을 담당할 두 가지 하드웨어를 각각 내놓는다. 그것이 홀로렌즈와 혼합 현실 장치다. 홀로렌즈가 물리적인 증강 현실 부문을 맡는 반면, 혼합 현실 장치는 몰입형 가상 현실 부문을 담당하는 셈이라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혼합 현실 장치를 가상 현실 장치라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은 플랫폼과 두 가지의 혼합 현실 장치라는 조건을 갖춘 뒤 두 시각 현실이 단일 플랫폼에서 융합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한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조건에 부합하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상황만 놓고 보면 말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유는 한국에서 혼합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일부 조건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혼합 현실 플랫폼이야 이미 윈도 10의 가을 업데이트로 해결한 상태다. 하지만 증강과 가상 가운데 가상 현실을 책임지는 혼합 현실 장치만 한국에 정식으로 도입할 것을 발표했고, 증강 현실 장치인 홀로렌즈는 출시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혼합 현실 조건을 구성하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둘의 다른 시각 현실 환경을 기반으로 혼합 현실을 설명해야 하는데, 홀로렌즈를 정식 도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마이크로소프트가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관계자들은 윈도 혼합 현실 장치가 기존 가상 현실과 다른 점을 부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외부 센서를 쓰지 않아도 공간을 인지하고, 단 두 가닥 케이블로 연결하기 쉬운 데다 헤드셋을 벗지 않은 채로 혼합 현실 포털에서 2만 개의 유니버설 앱을 실행할 수 있는 점을 기존 가상 현실과 다른 점으로 꼽은 것이다.
가상 현실 장치 환경과 비교할 때 윈도 혼합 현실 장치는 일부 장점을 가진 것은 맞지만, 이 장치를 이용하는 환경적 관점에서 가상 현실과 다른 점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혼합 현실 헤드셋에 내장한 카메라 센싱으로 추가 센서 없이 외부 환경을 인지해 6 자유도를 구현하는 것도 인텔이 포기한 융합 현실 장치인 ‘프로젝트 얼로이’에서도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구글 데이드림의 ‘월드센스’와 HTC 바이브 포커스의 ‘월드스케일’, 페이스북의 ‘프로젝트 산타 크루즈’ 등 퀄컴 가상 현실 레퍼런스를 모델로 개발 중인 가상 현실 헤드셋에도 들어간 것이어서 이를 혼합 현실 장치의 기술적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페이스북의 리프트 코어 2.0이 배포되면 오큘러스 리프트 이용자들도 혼합 현실 포털과 거의 동일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고, 밸브는 훨씬 흥미로운 포털을 개발자들이 직접 설계하도록 도구를 제공한 이후 조금씩 공유되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가상 현실도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장하는 혼합 현실 장치 환경과 유사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 혼합 현실은 증강 현실과 가상 현실이 겹치는 부분 또는 두 시각 현실을 유연하게 이어주는 통합 환경이라는 개념과 활용 사례의 소개가 필요했다. 하지만 홀로렌즈를 출시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다 보니 홀로렌즈와 연계한 모든 설명을 배제해야만 했고 윈도 혼합 현실 장치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혼합 현실을 한국에 소개하는 흔치 않은 기회까지 만들었는데, 그 시간을 이렇게 쓰고 싶었을까. 다만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는 혼합 현실 컴퓨팅을 위해 뛰고 있으나, 엄연히 현실로 존재하는 물리적 한계 앞에서 그 절반도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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