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와 한글

제가 처음 샀던 PC는 SPC-3000s이었습니다.
2개의 5.2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를 달고 나온 16비트 PC였지요.
그냥 컴퓨터라면 다 같은 건 줄 아는 수준이었을 때 샀던 것이라
숱한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은 말안해도 될 듯 합니다.
컴퓨터 속의 한글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사실 처음 샀던 PC는 한글과 그리 먼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운영체제가 한글 MS-DOS 였거든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3.x 대의 버전이었을 겁니다.
한글 MS-DOS가 안 좋은 지는 나중에 이해했는데,
어쨌든 디스크를 넣고 부팅하면 모두 한글로 나오는 줄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글이 되면 뭐합니까?
처음 넣었던 명령어가 이랬는데 말이죠.


a:\>format a:


그저 설명서 앞쪽 페이지에 있는 것만 따라 입력하다가 디스크를 날려 먹었습니다.
포맷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엉뚱한 명령어를 입력했던 것이죠.
그저 뭔가 실행되는 게 좋아서 또박또박 설명서에 있는 그대로 입력을 한 뒤
실행이 되는 것을 보고 좋아라 했는데… 그 뒤에는 말 안해도 알 겁니다.
두 번 다시 부팅 화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ㅠ.ㅠ


결국 그 PC를 집에 들여 놓을 때 신경써 준 이들에게 연락을 넣어 겨우 해결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컴퓨터 지식, 상식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쓰기 좋게 만든
한글 운영체제로도 컴퓨터와 소통을 하지 못한 것은 왠지 씁쓸한 기억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쨌든 그런 어려움을 겪은 몇 달 뒤에 아래아한글을 나왔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도 거의 없고 PC통신도 활성화되었던 시기가 아니었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아마 야자 빠지고 저녁마다 컴퓨터 학원에서 조금씩 뭔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구한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런데 집에서 아래아한글을 쓰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실행 속도는 문제가 없었는데, 화면에 표시되는 글자가 너무 컸거든요.
당시 제가 쓰던 컴퓨터의 그래픽 모드가 CGA였던 것이 문제였죠.
그 땐 CGA가 뭔지, 해상도가 뭔지, 컬러 수가 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나오는 게 그냥 PC가 이상한 것일 거라고 여길 수밖에요.


그래도 처음 접했던 아래아한글을 접했을 땐 마냥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컴퓨터에 글을 입력할 수 있는 다른 문서 프로그램보다 훨씬 고급스럽게 보였거든요.
물론 지금은 키보드마다 한영 키가 있지만, 당시에는 shift 키를 누른 채로
스페이스바를 눌러줘야 한영 모드를 바꿀 수 있던 것도 신기했고요.
무엇보다 아래아한글을 좋아한 것은 당시에 컴퓨터에서 할 수 있던 것이라는 게
학원에서 배운 초보적인 베이식 프로그래밍이나 게임을 실행하는 게 거의 전부였는데,
아래아한글에서 내가 입력한 글이 녹색 화면에 표시되는 게 기뻤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컴퓨터에서 할 수 있는 뭔가가 하나 더 늘어난 게 기분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아래아한글은 컴퓨터를 바꾸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텍스트 모드가 아닌 그래픽 모드를 쓰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낮은 해상도는 한글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걸 알려줬으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폰트를 저장해 놓은 도깨비 한글 4. (사진출처 : lswcap.com)
아, 그러고보니 가끔은 램 상주 한글 프로그램도 쓴 것 같은데요.
도깨비 말입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필요한 때 실행하고 한글을 쓰기도 했는데,
램에 띄워놓고 써야 하는 터라 언제나 램 관리에 신경쓰게 만들곤 했죠.
나중에는 롬 버전으로도 출시되었지만, 롬버전이 나올 시기에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한글을 내장하던 시기여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 같네요.


아마 한글이 잘 나오는 요즘 PC를 쓰는 이들에게 이런 세상이 있었나 싶겠지만,
정말 한글만큼 PC를 쓸 때 애타게 만들었던 것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만 해도 이렇게 쓰기 어려운 한글을 두고
디지털 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이 컴퓨터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게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모든 디지털 장치에서 흔하게 한글을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그 아픔은 많이 치유된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 완치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한글을 편하게 쓸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그 말을 쓰는 디지털 세계의 소통은 어딘가 모르게 더 어렵고 힘들어진 듯 합니다.
어쩌면 한글을 쓰면서 소통을 할 수 없는 새로운 병이 진행되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네요.


어제가 564돌을 맞이한 한글날이길래…
문득 한글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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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tsol Written by:

16 Comments

  1. 2010년 10월 10일
    Reply

    ㅋ…도깨비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아래아한글 1.5도…
    추억의 프로그램들 입니다 ㅋ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 칫솔
      2010년 10월 10일
      Reply

      고맙습니다. ^^

  2. 2010년 10월 10일
    Reply

    그러나 오늘날의 한컴의 모습을 보면 정말 씁슬합니다.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그러게요. 정말 씁쓸한 현실입니다.

  3. 2010년 10월 10일
    Reply

    이야.. 제가 쓰던 아래아 한글이 1.51버전이었는데..^^
    다시 봐도 기억이 새롭네요. 그때는 완성형 한글이라서.. 펲시콜라.. 이런 것들이 타이핑이 안 되었더랬죠.. 페ㅍ시콜라.. 이렇게 나왔던 게 생각나요..ㅋㅋ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ㅎㅎ 그랬지요. 그러고보면 오타, 깨진 글자도 추억거리네요. ^^

  4. dylanseo1995
    2010년 10월 10일
    Reply

    아래아 쓰는사람이 있긴있었나… Word2010 자체적으로도 막강한데다가 …. 온라인기능으로 연동해서 하는게 ㄷㄷㄷ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지금이야 많이 줄었지만, 옛날에는 국내 워드 시장을 거의 독식했지요.

  5. 랭랭
    2010년 10월 11일
    Reply

    오우 추억의 피시..
    제 첫피시는 spc-1500A 였는데.. ㅎㅎ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저도 삼성이나 대우의 MSX를 원했더랬죠. ^^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

  6. 2010년 10월 11일
    Reply

    덜덜덜 제가 처음 산 컴퓨터라는 정의가 다르겠지만
    음.. 집에서 처음산건 Apple ][ 였고,
    제가 직접 구매한건(부모님 돈으로) 뉴텍 P3-500
    그리고 제 돈으로 직접 구매한건 AMD2800+ 부터인거 같네요 ㅎ

    예전에는 한글 100타 영문 200 타였는데
    어느새 한글 600타 영문 300타 나오는 세상이 되었어요 ^^;

    config.sys
    dos=high,umb 였나요? ㅋ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오. 하이메모리 옵션을 쓸 수 있는 PC라니… 부럽습니다. ㅋㅋㅋ

  7. 2010년 10월 12일
    Reply

    …전 아이큐2000, 애플2, XT… 한글 1.52는 보니 반갑네요. ^^ 안정적이라서 참 좋았는데.

    • 칫솔
      2010년 10월 12일
      Reply

      아이큐 2000. 저의 첫 PC가 될 뻔 했죠. 어릴 때 제 로망이었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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