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달 전 젊은 창업자를 대상으로 최신 IT 제품 트렌드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대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유행하는 제품이야 하루가 다르게 바뀌니 현 시점에 그 이야기를 해버리면 곧바로 지나가버리는 흐름이 될 것 같아 이만저만한 고민이 아니었더랬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제를 정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던 셈이다. 결국 지금의 유행은 아니지만 최근 분위기를 보며 곧 트렌드로 자리 잡을 세 가지를 추리는 과정을 거치며 모바일 가상현실(이하 VR)을 세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잡았다.
가상 현실은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가상 현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모니터에서 보던 평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시각적으로 훨씬 발달된 컨텐츠다. 모니터가 있는 전방이 아니라 이용자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그 곳에도 세상을 볼 수 있고 그것이 평면이 아닌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 마치 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몰입감을 높인다. 비록 화면이 달린 장치를 통해서 들여다보는 세계에 불과하지만, 그 세계를 보는 동안 우리는 실제로 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마법을 부리는 기술이자 컨텐츠인 셈이다.
그런데 가상 현실이 어제 오늘 기술은 아니다. 거꾸로 올라다면 제법 오래된 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어는 훨씬 오래됐지만, 기술적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1950년대부터 이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1960년대 센소라마 같은, 오늘 날 표현으로 따지면 4D 가상 현실 같은 장치도 등장하고, 그 이후에 HMD 형태의 가상 현실 장치들이 자주 등장한다.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도 단순히 특수한 게임 환경 만이 아니라 의학이나 우주 항공 연구까지 도입되기도 햇다. 단지 일반적인 상용화만 이뤄지지 못했을 뿐이다. 설익은 기술력과 비싼 하드웨어, 부족한 컨텐츠 등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고 어렵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그런 분야의 하드웨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VR은 새롭게 봐야 할 시장이다. 이용자의 접근을 막았던 설익은 기술력과 비싼 하드웨어, 부족한 컨텐츠라는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완전히 새로운 하드웨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머리에 쓰는 장치(Head Mount Display) 형태에서 벗어나긴 어렵지만, 상용화의 걸림돌인 하드웨어 비용이 점점 낮아지고 있어서다. 더구나 조금 의외로 생각되는 점은 스마트폰이 VR을 앞당길 촉매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은 VR 구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을 모두 담고 있고 이를 활용한 보조 장치들이 쏟아질 전망이다.
이미 여러 소식을 들어 알고 있을 기어 VR이나 VR 원, Go4D VR 같은 다채로운 모바일 VR 장치들이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가상 현실 장치다. 아이폰용 VR도 제작 비용을 모금하는 크라우드펀딩을 진행 중인데, 두말하지 않아도 VR을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이런 보조 장치들의 공통점은 VR에 필요한 기본적인 광학 부품, 그러니까 렌즈와 머리에 고정할 수 있는 장치만 갖췄을 뿐, 화면이나 그 밖의 처리 장치가 전혀 없다. 앞부분에 스마트폰을 꽂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두고 제품에 따라 음량이나 메뉴를 조작할 수 있는 몇몇 기능을 조잘하는 장치를 넣었을 뿐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VR 장치들은 이제 등장하는 시점임에도 등장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그만큼 이러한 환경에 대비한 준비를 해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많은 이용자들이 늘 쓰는 스마트폰은 고해상도 화면과 프로세서, 저장 장치와 네트워크 기능 등 VR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확장형 제품들이 나올 수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용자는 늘 쓰던 폰을 이용하는 것 뿐이라 완전히 새로운 장치를 사야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것고 거북스러운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아도 되므로 손쉽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컨텐츠다. 이날 강연도 초기 모바일 VR 시장은 하드웨어를 통해 일찍 무르익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장의 성장을 지속하는 것은 결국 컨텐츠라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하드웨어를 보급해도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없으면 금세 시들고 마는 것은 여러 번 목격했으니 말이다. 3D 영화의 돌풍을 몰고 온 <아바타> 덕분에 3DTV 시장까지 폭발하는 듯 싶다가도 높은 수준의 3D 컨텐츠 부족으로 결국 TV 시장을 지속적으로 견인하지 못한 과거는 컨텐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전례로 지금도 반복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VR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모바일 VR 시장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몇몇 신기한 컨텐츠가 분위기를 주도하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선 새로운 컨텐츠가 필요하다. 마치 스마트폰 초기 시장과 비슷한 상황이다. 하드웨어는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컨텐츠가 없어서 즐길 수 없던 바로 그 때와 똑같다. 페이스북이 VR 스타트업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인수하고 삼성을 통해 그 플랫폼을 적용한 제품을 내놓는 상황이나, 구글이 개발자 행사에서 뜬금없이 카드 VR을 선보이는 게 단순한 쇼라고 볼 수 없는, 그래서 아주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 분야다. 물론 무조건 가상 현실 시장이 열릴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이 시장을 꽃피게 하려면 여전히 많은 조건이 요구되고 있으니 말이다. 단지 개발자든 이용자든 다른 세상에 먼저 들어갈 용기를 발휘해야 할 시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언제나 모험은 위험하지만 때론 흥미진진한 결과물을 안겨준다는 것이 이전 스마트 생태계의 또 다른 이면이었으니까…
덧붙임 #
이 글은 에코노베이션 블로그에 기고한 글로 이 블로그에 맞춰 문체와 일부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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