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시장의 산업 규모를 예측해 온 상당 수의 보고서에서 가상 현실은 증강 현실에 비해 작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전망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투자 방향이나 정책을 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상 현실의 미래를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산업적 측면의 가능성만 보는 것이 과연 옳은 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오늘날 가상 현실의 표면적인 형태나 현상만 보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다. 가상 현실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가능성을 세밀하게 분석해 예측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기술 수준이나 이용자의 관심을 끌어내는 특정 분야, 지역별 보급 수준에 따라 시장을 예측하다보니 가상 현실의 다른 면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래에 만나게 될 가상 현실의 다른 면이란 여러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컴퓨팅의 진화한 형태를 갖게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 중 하나다. 수십년 전 데이터 시대가 열린 이후 이를 처리하는 컴퓨팅 환경은 네트워크의 진화와 함께 무섭게 성장해 왔고, 지연 없는 네트워크를 통해 대용량 데이터를 전송하고 처리한 뒤 보던 결과는 지금처럼 기계 중심적 화면이 아닌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형태가 될 것으로 믿고 있어서다. ‘기계는 물론 인간 감각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해 구축한 디지털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 친화적 컴퓨팅 환경’으로 차세대 컴퓨팅을 정의할 때, 그 세계를 사람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은 가상 현실일 수밖에 없어서다.
아마도 이 같은 결론 때문에 지금까지 페이스북과 오큘러스의 움직임을 꾸준하게 지켜본 것일 게다. 차세대 컴퓨팅으로써 가상 현실의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업이 페이스북과 오큘러스이기 때문이다. 2014년 페이스북이 오큘러스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나의 상상 속 결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처럼 특정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만나는 입체화된 소셜 미디어의 등장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페이스북과 오큘러스는 생각보다 가상 현실을 훨씬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가상 현실에 대한 페이스북과 오큘러스의 진지함은 가상 현실 개발자들을 위해 해마다 개최해 온 오큘러스 커넥트마다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나는 항상 오큘러스 커넥트의 첫날 키노트 마지막에 등장하는 마이클 애브라쉬의 발표를 좋아한다. 오큘러스 리서치 랩을 이끄는 그의 발표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가상 현실의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를 설명하고 오큘러스와 페이스북이 노력한 결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 오큘러스 커넥트 6에서 많은 이들은 2020년 내놓을 가상 현실 기반 소셜 미디어 서비스인 호라이즌(Horizen)이 큰 관심을 보였다.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를 연상케 하는 대규모 가상 현실 커뮤니티의 등장은 충분히 관심을 모을 만했다. 하지만 나의 눈길을 끈 대목은 따로 있다.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가 가상 현실을 차세대 컴퓨팅이라고 선언한 점과 차세대 컴퓨팅을 위해 시간을 갖고 해결 중인 문제에 대한 마이클 애브라쉬의 설명이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가 MWC 19에서 혼합 현실을 차세대 컴퓨팅이라 선언한 이후 페이스북과 오큘러스가 이러한 정의에 동참한 기업이 된 것 자체가 흥미롭다. 매우 오래된 컴퓨팅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러려니 해도, 페이스북과 오큘러스는 소셜 미디어 기업 및 가상 현실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 차세대 컴퓨팅 기업으로써 전환을 시작한다는 선언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스북과 오큘러스가 그 선언을 언제쯤 하느냐는 것은 시간 문제였지만, 오큘러스 커넥트 6를 기점으로 삼은 것은 가상 현실 중심의 차세대 컴퓨팅 시장에서 이미지를 쌓기 위한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페이스북과 오큘러스가 연구하고 있는 결과물들을 볼 때면 흥분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 친화적인 차세대 컴퓨팅에 필요한 장치와 기술을 꺼내놓을 때마다 이들이 얼마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특히 이번 오큘러스 커넥트 6에서 눈여겨볼 점은 가상 현실 헤드셋의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인 광학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부분이다. 가상 현실 헤드셋은 컴퓨팅 부품과 광학 기술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기술 세트지만, 렌즈 가공에 따라 그 품질의 편차가 매우 달라진다. 더 넓은 시야각은 물론 시각적 편의성과 헤드셋의 무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반사와 복사하도록 복잡하게 가공된 프레넬 렌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전의 프레넬 렌즈는 매우 특수한 구조로 가공되지만, 고정 초점만 갖고 있어 가까운 사물과 먼 사물에 대해 대응이 어렵다. 이는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표현한 가상 현실 속 장면에 대한 표현력은 문제가 없으나 사물을 가까이 당겼을 때 초점이 맞지 않게 돼 눈이 아프고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유발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안구 움직임에 맞춰 초점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큘러스가 내놓았던 것이 하프 돔(Half Dome) 시제품이었다.
하프 돔 시제품은 프레넬 렌즈를 고정시키지 않고 안구 움직임에 맞춰 전동 장치로 앞뒤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초점을 조절했다. 이를 통해 가까운 사물을 볼 때와 원거리 사물에 대한 초점 거리 및 렌더링을 제어하는 것을 통해 기존 가상 현실 헤드셋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큘러스는 이 방식으로 하프 돔 2까지 시제품을 진척시켰으나, 전동 장치라는 특성 때문에 헤드셋 구조가 매우 커지고 이로 인해 무게가 증가하며, 움직임마다 소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또한 안구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도 한계가 있고 전력 소모도 많은 상황이었다.
이번 오큘러스 커넥트 6는 기존 전동식 대신 새로운 해결책을 처음 공개했다. 전동식을 쓰지 않는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Liquid Crystal Lens)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렌즈에 충전된 액체의 모양을 조정해 초점을 조정하는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 기술을 활용해 아주 얇으면서도 가벼운 초점 조절식 렌즈를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오큘러스는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 1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초점 거리를 가진 여러 엽으로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 배열을 만들고 안구의 움직임에 따라 해당 초점의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를 켜는 방식을 통해 기존 전동식 렌즈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렌즈가 그냥 주장과 연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 시제품으로 공개됐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프 돔 3′(Half Dome 3)다. 하프 돔 3는 하프 돔 2보다 크기를 대폭 줄이면서도 날렵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전동식의 소음이나 초점 속도도 해결했고, 전력 소모량도 크게 줄이는 등 기존 전동식 초점 조절 렌즈 모듈에서 나타난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오큘러스가 당장 이 제품을 상용화하기는 어렵다. 아직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단계인 데다 리퀴드 크리스털 렌즈 기술의 완성도 및 생산 단가, 안구 추적 장치의 안정성 및 콘텐츠 개발 환경 등 많은 부분의 변화가 필요한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오큘러스가 좀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시제품을 통해 연구를 하는 동안 생산 가능 시점에 대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점 조절을 할 수 있는 가상 현실 헤드셋은 확실히 장치로써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페이스북와 오큘러스는 헤드셋만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맨 처음 광학을 언급했지만, 기계 학습으로 주변 환경을 알아채고 분석하는 머신 퍼셉션과 가상 캐릭터임에도 실제 사람과 똑같은 생김새와 말할 때 입모양까지 그대로 따라하는 인공 지능 알고리듬을 결합한 아바타에 대한 연구 결과도 공개했다. 특히 머신 퍼셉션으로 공간을 구축하고 실제와 흡사한 아바타의 결합은 현재 영상을 주고 받는 원격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실제 사람과 사람이 직접 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줄 수 있으므로 그 진화를 눈여겨 봐야 한다. 더구나 기존 헤드셋 이용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기에 실제 가상 현실 내 협업 서비스를 시작하면 가상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만들 수도 있다.
이처럼 가상 현실을 차세대 컴퓨팅의 관점으로 접근하며 차근차근 숙제를 풀어 나가는 페이스북과 오큘러스지만, 가상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더 많은 시간을 설득해야 할 듯하다. 수십 년전 비싼 컴퓨터를 개개인이 쓸 수 있게 됐을 때나, 10여전 전 스마트폰 대중화가 시작했을 때도 똑같이 말한 이들이 있었으나, 결국 그 변화에 적응한 세대가 등장하고 산업 구조를 바꾸면서 모든 그 편견을 날려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가상 현실의 부정적 시각은 큰 단점으로 야기될 위험성과 안정된 시장을 놔둔 채 불확실성을 좇을 수 없는 복잡함으로 내린 결론이겠으나, 오늘을 잣대로 미래를 재단해서는 안되는 상황이다. 무엇이 차세대 컴퓨팅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오큘러스 커넥트 6에서 마이클 애브라쉬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앨런 케이의 말을 인용해 “차세대 VR을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VR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로 바꾼 것을 보면, 가상 현실이 차세대 컴퓨팅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연구하고 있는 페이스북과 오큘러스의 노력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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