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년 동안 노트북은 그 형태를 거의 유지해 왔다. 화면이 있는 덮개를 열면 키보드와 배터리, 각종 처리 부품을 담한 본체가 나타나는 구조다. 이같은 노트북 폼팩터는 앞으로도 꽤 오래 보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태의 노트북만 유일하리라고 보긴 힘들다. 우리가 일을 하는 데 더 편한 디스플레이가 나타나면 컴퓨팅 하드웨어도 그에 맞춰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폼팩터를 바꾸기 때문이다.
사이트풀(Sightful)의 스페이스톱(Spacetop)은 그런 가능성을 가진 제품 가운데 하나다. 스페이스톱이 흔하게 볼 수 있는 노트북과 다른 점은 덮개 역할을 하는 상판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상판에 있는 평평한 화면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디스플레이가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화면을 없앤 것은 대체 디스플레이를 넣었다는 뜻. 스페이스톱은 일반 평면 화면을 스마트 안경으로 바꾼 컴퓨터다.
노트북 디스플레이를 스마트 안경으로 바꾼 것은 실제 우리 눈으로 보는 화면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다. 물리적으로 크기가 고정된 평면 디스플레이를 더 크게 볼 수 없지만, 스마트 안경으로 보는 공간 안에 띄우는 화면의 크기는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훨씬 큰 화면을 구현할 수 있다. 노트북은 물리적 디스플레이를 크게 만들 수록 더 크게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스마트 안경이나 XR 헤드셋을 이용하면 굳이 노트북 본체를 화면 크게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페이스톱의 스마트 안경은 지금은 엑스리얼(XReal)로 회사 이름을 바꾼 엔리얼의 엔리얼 에어(Nreal Air)다. 엔리얼은 엔리얼 에어를 증강현실 안경(AR Glasses)으로 소개하지만, 공간을 가늠하는 데 필요한 센서가 상당수 생략한 터라 증강 현실 기능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엔리얼 에어(현 엑스리얼 에어)가 증강 현실 안경으로 기능하지 못할 지라도 공간에 대형 디스플레이를 띄우는 기능은 쓸만하다. 결과적으로 스페이스톱은 공간에 작업 창을 띄우도록 만든 안경형 디스플레이 기능을 활용하도록 만든 휴대 가능 컴퓨터인 셈이다.
스페이스톱은 스냅드래곤 865 프로세서와 8GB 램, 256GB 저장 공간 등 제원을 갖췄다. 모바일용 프로세서를 쓴 것은 디스플레이를 없앤 대신 스마트 안경을 구동하는 데 적합한 하드웨어로 구성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운영체제도 제조사인 사이트풀이 직접 개발한 스페이스톱 운영체제를 탑재하고 있다. 한번 충전으로 최대 5시간 작동하고 충전을 위해 전원을 연결하면 2시간만에 빈 배터리의 85%를 채운다.
이러한 구성 때문에 스페이스톱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스페이스톱은 일반적인 노트북을 대체할 수 있는 성능이나 환경을 갖고 있지 않아서다. 현 세대에 평균적인 성능을 갖춘 처리 장치나 램, 저장 공간을 갖춘 것도 아니고, 배터리 시간도 다른 노트북보다 짧다. 그래도 발열을 위한 팬을 넣지 않아도 되는 만큼 시끄러운 소음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클 걸림돌은 윈도를 실행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디에서나 컴퓨터를 이용한 생상적인 일을 하려고 만든 노트북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에 최적화된 앱과 이를 처리할 능력을 갖췄다고 보긴 힘들다. 아무리 클라우드 환경을 구현한다고 해도, 네트워크 연결이 불가능하거나 불안정한 상황까지 감안하면 스페이스톱은 실험적 제품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이스톱의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작업하는 디스플레이의 한계를 넘어 서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엑스리얼 에어 같은 스마트 안경이나 메타 퀘스트 프로, 애플 비전 프로 같은 XR 헤드셋은 가상이든 물리적 현실이든 공간에 디스플레이를 만들기 때문에 평면 디스플레이의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엑스리얼 에어는 카페처럼 전방에 넉넉한 공간이 있는 곳에선 최대 100인치 디스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메타 퀘스트 프로나 애플 비전 프로 같은 헤드셋은 이보다 훨씬 큰 디스플레이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아직 이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굳이 더 큰 가상 화면을 쓸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XR 헤드셋의 큰 화면에서 기존 데스크톱에 대한 작업에 익숙해지면 물리적인 한계를 가진 대부분의 모니터나 TV에선 결코 크다는 느낌을 갖기 어려워진다. 디스플레이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에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우려할 수는 있지만, 노안이 온 이후에 디스플레이를 볼 때마다 안경을 썼다 벗는 이들에겐 차라리 안경 대신 헤드셋만 쓰는 것이 불편을 훨씬 덜어준다.
이처럼 XR 헤드셋에서 얻는 디스플레이 경험이 늘어날 수록 PC 폼팩터의 변화를 가져올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지면 결국 스페이스톱 같은 오늘 날의 실험작이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다. 스페이스톱처럼 완전하게 디스플레이를 없앤 제품일 수도 있고, 기존 노트북에 XR 헤드셋을 덧붙이는 형태일 수도 있으며, 설정을 위한 작은 화면을 갖춘 정도의 키보드형 PC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XR 헤드셋을 활용성을 높이려 할 것이다.
물론 스페이스톱은 앞서 말한 이유로 성공적인 제품이 될 거란 보장은 하기 어렵다. 성능이나 운영체제, 기능 등 전반적으로 일반적인 PC 이용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부족해서다. 다만 물리적 디스플레이의 한계를 깨는 XR 헤드셋에서 작업 경험이 더 늘어나면 스페이스톱 같은 제품을 찾을 여건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둘 뿐이다. 새로운 PC 폼팩터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은 지금은 매우 낮지만, 더 품질 좋고 값싼 XR 헤드셋의 더 많이 등장할 수록 가능성의 확률 그래프가 가파르게 오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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