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 2023에서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건 조금 급조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메타버스를 키워드로 내세운 것도 나름대로 그 흐름을 무시하긴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실제 CES 2023에서 메타버스와 관련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XR 분야 기업들은 의외로 적지 않았는데, 이 가운데 3D 디지털 세상인 메타버스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 것은 XR 헤드셋과 무안경 3D 디스플레이이었다.
VR 헤드셋에서 MR 헤드셋으로 바뀐 흐름
비록 CES만의 트렌드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가상 현실 헤드셋을 CES 현장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CES 개막 전 공개되거나 출시한 헤드셋에다 CES에서 첫 발표하는 새로운 헤드셋을 더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그 분위기를 이끌어 온 것은 분명해서다.
물론 세계적인 대규모 감염병 유행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지난 2년 동안 CES도 정상적으로 개최되지 못했던 터라 그 분위기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그렇다고 기대감을 꺾을 필요는 없게 됐다. 팬더믹을 겪으면서 원격 업무 및 교육, 각종 훈련 등 앞으로 이러한 헤드셋을 활용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 늘었고 관련 산업도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다.
그런데 이번 CES는 헤드셋 흐름에 재미있는 변화가 생겼다. 가상에서 혼합 현실(Mixed Reality)로 기능적인 변화가 좀더 두드러진 모양새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CES 때문에 바뀐 변화는 아니다. 단지 CES 직전 출시된 제품들부터 시작해 CES에서 선보인 새로운 제품이 합세하면서, 그 변화가 더욱 뚜렷해졌다는 분석이 좀더 설득력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MR 헤드셋이 VR 헤드셋보다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도 아니다. 크기나 부피를 줄인 것도 이미 이전에 공개했던 제품들이고, 과거 VR 헤드셋처럼 몰입감을 위해서 차폐성을 유지한 헤드셋도 여전하다. 그래도 몇 년 전, VR 헤드셋마다 거의 공통적인 단점으로 지적되던 무게와 부피에 대한 나쁜 비평이 상당히 사라진 것은 고무적이다.
CES 2023에서 새로 선보인 MR 헤드셋은 한둘이 아니다. HTC 바이브 XR 엘리트(HTC VIVE XR Elite)는 가장 많이 주목 받은 상업적 MR 헤드셋이다. 컬러 패스스루 및 눈과 손 추적, 시력 조절 렌즈 등을 갖춰 지난 해 가을 출시된 메타 퀘스트 프로에 견줄 만한 제품처럼 소개됐다. 컬러 패스스루 덕분에 VR 헤드셋이면서 외부 공간을 헤드셋 안쪽에서 볼 수 있고, 혼합 현실 앱에 따라 실물 공간 위에 디지털 콘텐츠를 겹쳐서 표시할 수 있다.
TCL은 헤드셋 분야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제조사였지만, CES 2023에 눈여겨 볼만한 제품을 공개했다. TCL 넥스트웨어 V(NXTWear V) 헤드셋은 픽셀과 픽셀 사이의 미세한 선이 있는 스크린도어 효과를 없앤 1,512ppi 픽셀 밀도를 구현하면서도 무게는 236g에 불과하다. 시야각은 108도로 모자람은 없는 수준이고 패스스루를 포함한다. 다만 TCL는 넥스트웨어 V를 상업용으로 출시할 계획을 밝히진 않았다.
링스 R1(Lynx R1)은 프랑스 스타트업이 만든 MR 헤드셋으로 사실 CES 2023 이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알려졌다. 단지, CES 2023을 기점으로 크라우드펀딩으로 주문한 첫 제품의 배송을 시작하면고 CES 2023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링스 R1은 컬러 패스스루에 특화된 독특하고 두터운 렌즈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으로 헤드셋 앞부분을 위로 올려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눈과 손 추적 기능을 갖췄고 90도 시야각과 1,600×1,600 픽셀의 디스플레이를 넣었다.
솜니움 스페이스가 공개한 솜니움 VR1은 모듈식 개방형 XR 헤드셋이다. CES에서 관련 소식은 여럿 나왔지만, 현장에서 제품 체험을 최소화했다. PC에 연동해야 하는 헤드셋으로 장치만 따로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R 모드와 AR 패스스루 모드를 모두 갖췄다. 특히 4K 패스스루 카메라를 탑재한 것이 인상적이고, 필요한 부품 모듈을 3D 프린터로 출력해 결합할 수 있는 개념을 도입했다. 다만 CES 2023에서 공개한 제품을 그대로 출시할 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파나소닉 자매 브랜드인 시프트올(Shiftall)이 선보인 메가넥스(MeganeX)는 얼굴을 절반 이상 덮는 다른 헤드셋과 달리 눈 부분만 가린 형태여서 마치 두꺼운 안경에 가깝게 만들었다. CES 이전에 미리 공개된 시프트올 메가넥스는 코핀에서 만든1.3인치 마이크로 OLED를 실었고, 눈당 2,560×2,560 픽셀을 표시한다. 매우 밝은 색상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디스플레이를 채택했고, 플립VR이라는 독특한 컨트롤러를 채택했다. VR용 칩셋(스냅드래곤 XR1)을 탑재했으나 PC에 꽂아야 작동하고 스팀VR과 호환된다.
조금 의외의 헤드셋은 인도 제조사인 아즈나렌즈(AjnaLens)가 공개한 아즈나 XR(AjnaXR)이다. 아즈나 XR의 형태는 링스 R1처럼 보이는데, 앞쪽 헤드셋 형태가 양옆을 완전히 가리는 것은 아니어서 가볍게 보인다. 역시 패스스루 AR을 지원하는 한편, 눈과 손 추적 센서를 모두 갖췄다. 눈당 2,280×2,280 픽셀의 디스플레이를 적용한 산업 전문가 버전이 CES에서 소개됐지만, 소비자 버전은 함께 공개되지 않았다.
캐논은 엠리얼(Mreal)이라는 MR 헤드셋을 CES 2023보다 1년 앞서 출시했지만, 이번 CES에서 혼합 현실 소프트웨어 데모를 선보였다. 엠리얼은 헤드셋 양옆을 가리지 않는 매우 가벼운 형태의 헤드셋으로 캐논은 엠리얼을 착용한 시연자가 CES에서 빈공간에 놓인 가상의 자동차를 패스스루 방식으로 탐색하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엠리얼은 눈당 1,600×1,200 픽셀에 120Hz 화면 재생율을 가진 MR 헤드셋이지만, 시야각이 45도로 좁다. 독립형 장치는 아닌 PC와 연결해 사용하지만, 별도의 외부 센서 없이 헤드셋만으로 인사이드 아웃 추적을 할 수 있다.
이 밖에 샤프가 스키 고글 형태의 XR 프로토타입을 선보이는 등 대체로 가상 현실보다는 패스스루를 통한 혼합 현실 헤드셋이 CES 2023을 채워 그 흐름을 확인하는 것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여기에 CES 2023에 등장하지 않은 메타 퀘스트 프로나 피코 계열 헤드셋까지 포함하면 이미 이 시장의 흐름은 혼합 현실 쪽으로 넘어간 상황으로 이해해도 무리 없는 수준이다.
다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주도했던 윈도 혼합 현실 관련 제품은 CES 2023에서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더해 CES 이후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 및 알트스페이스VR, MRTK(혼합현실 툴킷)을 담당한 부서가 모두 마이크로소프트 감원 대상에 포함되면서 윈도 중심의 혼합 현실 시장은 확실하게 문을 닫게 됐음을 확인시켰다. 홀로렌즈 사업부는 IVAS 납품에 필요한 미 의회 예산이 통과되지 않은 이후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고, 2017년 인수했던 알트스페이스VR은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혼합 현실 하드웨어와 서비스 사업을 중단해도 마이크로소프트 365와 팀즈 같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요 포트폴리오를 다른 메타버스나 가상 환경에 적용할 예정이므로 메타버스 사업을 중단한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무안경 3D 디스플레이 제품들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같은 지금의 평면 디스플레이로는 3D로 만든 디지털 세상을 2D 변환해 볼 수밖에 없는 탓에 공간에 대한 감각이 중요한 메타버스에 어울리는 하드웨어라고 말하긴 어렵다. XR 헤드셋의 존재 이유는 3D로 만든 디지털 세계를 2D로 변환하지 않고 우리 현실과 거의 같은 공간 그 자체로 보게 만들어 몰입도를 높이기 때문이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디지털 세상을 보기 위해 헤드셋을 쓰면 실제 현실을 차단하는 듯한 약간의 거부감을 낳는다. 때문에 현실에서 가볍게 가상 세계로 들어가려면 XR 헤드셋과 다른 형태의 디스플레이 장치가 필요하다.
이번 CES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존재했던 상황이다. 한 때 유행했던 3D 모니터나 3D TV 같은 하드웨어처럼 디지털 세상을 3D로 볼 수 있는 장치는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특수 안경을 쓴 채 봐야만 했던 3D 모니터나 3D TV가 오늘날의 메타버스에 유효한 장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디스플레이 기술의 진화에 따라 안경 없이 볼 수 있는 무안경(Glass Free) 3D 디스플레이 장치들이다. 때문에 CES 2023에서 많은 수는 아니어도 무안경 3D 디스플레이 장치를 볼 수 있게 된 점이 흥미롭다.
소니는 공간 현실 디스플레이(Spatial Reality Display)의 시제품을 공개했다. SR 디스플레이는 사실 2020년에 15.6인치 모델이 공개됐고 실제 상업 판매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 CES에서 공개된 제품은 훨씬 커진 27인치 디스플레이의 시제품으로 안경을 쓰지 않고 3D로 만들어진 각종 데이터와 의료 데이터 등을 평면 형태의 화면에서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다. 이용자의 눈 위치에 따라 입체감을 조정하는 소니 SR 디스플레이에 대한 정확한 제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평면 형태의 소니 SR 디스플레이와 달리 브레일런(Breylon)은 매우 독특한 무안경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이미 브레일런은 CES 2022에서 파노라마 무안경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는데, 이 디스플레이를 만든 목적이 머리에 헤드셋을 쓰지 않아도 3D 공간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CES 2023에선 좀더 독특한 외형의 파노라마 디스플레이인 브레일런 퓨전(Breylon Fusion)을 공개했는데, 안경이 필요한 3D 영화를 볼 때 선명도가 떨어지는 단점도 이 디스플레이에선 찾아볼 수 없다. 다만 8K OLED를 활용하는 브레일런 퓨전은 일반 소비자용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서 당장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에이수스는 모니터가 아닌 3D 노트북을 CES 2023에 공개했다. 에이수스 프로아트 스튜디오북 16 3D OLED는 16인치 크기의 OLED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노트북이지만, 독특한 3D 디스플레이 기술을 얹었다. 에이수스 프로아트 스튜디오북 16 3D OLED도 안경 없이 3D 화면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적용된 스페이셜 비전(Spatial Vision)이라고 부른다. 에이수스가 독점 공급받아 이 노트북에 적용된 3D 패널은 렌티큘러 렌즈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OLED 패널 위에 유리 패널, 렌티큘러 렌즈 층, 2D/3D 스위칭 층, 무반사 코팅 유리면으로 구성해 필요에 따라 2D와 3D를 전환할 수 있다.
에이서 프레데터 헬리오스 300 스페이셜랩스 에디션도 입체 시각 경험을 할 수 있는 노트북이다. 이 노트북은 이미지 센서가 장착된 2개의 스테레오 카메라가 눈과 머리의 위치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사전 설치된 스페이셜랩스 트루게임(SpatialLabs TrueGame) 소프트웨어가 이를 제어해 안경을 쓰지 않고 입체감을 경험하게 한다. 2D로 이용할 때는 4K 디스플레이로 작동하고, 입체감을 살려야 하는 3D 콘텐츠를 실행할 땐 2K로 해상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된 게이밍 노트북이다.
이 밖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몇몇 무안경 3D 모니터도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무안경 3D 디스플레이를 갖춘 제품들은 영상을 중심에 뒀던 과거와 달리 이제 3D 게임이나 3D 소셜 서비스 등 메타버스화 가능성을 가진 디지털 콘텐츠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쪽에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시장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닌텐도 3DS 같은 모바일용 무안경 3D 디스플레이 장치를 찾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디지털 세상을 물리적 현실에서도 세상처럼 볼 수 있게 하려는 분명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다. 아마도 3D 세상이 좀더 확장되면 이러한 제품들은 다음 CES가 오기 전까지 더 늘어날 것이고, 디지털 세상을 우리의 세상처럼 이해하도록 만드는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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