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프로에서 가상 현실을 멀리 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애플

애플이 6월 초 공개한 비전 프로는 아직 판매 전이다. 아직 어떤 평가를 내리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상 현실에 대해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컨트롤러의 부재가 그 중 하나고, 다른 문제는 가상 경계에 관한 것이다.

앞서 컨트롤러의 부재에 대한 문제는 애플 비전 프로가 나오기 전에 공개했던 ‘손 추적 중심 애플 리얼리티 프로의 불안한 홀로서기’에서 이미 설명했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발표하면서 이에 연동할 6자유도 컨트롤러를 내놓지 않았고, 지금도 이를 위한 컨트롤러를 개발하거나 자체 지원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컨트롤러가 없는 비전 프로에서 기존 가상 현실 앱을 포팅할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컨트롤러 못지 않게 가상 현실을 멀리하는 다른 문제는 가상 경계다. 가상 경계는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고 디스플레이를 통해 보는 몰입형 공간에서 움직일 때 안전을 위해 설정하는 가상의 벽이다. 앞서 출시된 가상 현실 헤드셋에 따라 가상 경계가 센서 퓨전 등으로 가상 경계 안쪽을 추적하는 데 필요한 포인트 클라우드를 설정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점 만큼은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비전 프로의 가상 경계는 머리를 중심으로 3x3m에 불과하지만, 메타 퀘스트의 가상 경계는 최대 15x15m까지 설정할 수 있다.

애플 비전 프로도 가상 경계 시스템을 갖추고 있긴 하다. 비전 프로 관련 개발 문서에 따르면 ‘완전 몰입형 환경이 시작되면 시스템은 착용자의 초기 머리 위치에서 1.5m까지 확장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정의한다.’고 되어 있다. 즉, 비전 프로는 헤드셋을 착용한 머리 위치를 기준으로 전후좌우 1.5m, 그러니까 최대 3x3m의 가상 경계를 자동 설정하는 것이다. 이용자가 직접 가상 경계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그나마 안전을 위한 자체 가상 경계를 설정하도록 만들어 두긴 했다. 이용자가 아주 넓은 공간에 있어도 이 크기는 변함이 없다.(참고로 메타 퀘스트 시리즈의 가상 경계는 최대 15x15m로 설정할 수 있어 공간이 넓을 수록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3x3m 가상 경계가 결코 좁은 것은 아니다. 어지간한 집 거실이면 이 정도 영역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다. 애플 문서에서 ‘머리가 이 영역을 벗어나면 환경이 자동으로 중지되고 패스스루로 전환돼 사용자가 물리적 환경의 물체와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 부분의 작동 조건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 작동 조건이란 이용자가 가상 경계를 만드는 중심에서 1m 정도만 이동하면 가상 경계가 해제되도록 시스템이 일찍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3x3m 짜리 가상 경계라도 이용자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1m만 이동하면 비전 프로는 안전을 위해 가상 현실에서 혼합 현실로 전환한다.

애플 비전 프로도 가상 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발표 당시 대부분의 시연에서 한 자리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콘텐츠였다.

이것이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애플 비전 프로의 가상 현실 모드에선 가상 경계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비록 최대 3m의 가상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1m만 이동했을 때 가상 현실 모드가 해제된다면, 결국 이용자가 실제 움직일 수 있는 최대 공간은 전후좌우 1m씩이므로 2x2m다. 그러니까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거리는 2m에 불과하다. 

사실 조금 좁은 영역이긴 해도 2m라는 거리조차 결코 좁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은 여기에 더 까다로운 조건을 하나 더 붙여 놓았다. 이용자가 실제 물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시스템이 VR 경험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체에 다가갈 때 혼합 현실로 전환하는 것은 안전을 위해 충분히 납득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가상 현실 모드가 해제되는 것은 아무리 안전을 위한 것이라도 너무 보수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아마도 맨손으로 할 수 있는 피트니스나 명상처럼 거의 제자리에서 하는 앱이나 의자에 앉아서 콘텐츠를 즐기는 앱에선 이 조건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 출시된 가상 현실용 앱 가운데 넓은 공간을 요구하거나 제자리에 있더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앱이 훨씬 많다. 좌우로 넓게 움직이는 운동 앱이나 비교적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는 여행 앱, 빠른 움직임을 요구하는 게임처럼 비전 프로의 가상 경계 조건에 맞지 않는 앱이 결코 적지 않다. 이러한 가상 경계 조건은 새로운 운영 체제인 비전OS의 안전 조치이므로 출시되는 국가 모두 해당 기능을 활성화할 수밖에 없고, 안전을 우선시하는 애플의 태도로 볼 때 한동안 타협 없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비전 프로 헤드셋 상단의 용두를 돌리면 손쉽게 가상 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다채로운 가상 현실 앱을 즐길 수 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안전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컨트롤러 부재와 가상 경계에 대한 까다로운 지침을 둔 점은 결과적으로 애플이 비전 프로의 가상 현실 모드를 최대한 배제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비전 프로를 내놓기 이전부터 줄곧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대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한편, 물리적 환경에서 공간 컴퓨팅을 강조하고 있는 자세에서 애플은 이 제품이 되도록 실제 세상을 단절한 채 가상의 세계에서 활용하는 용도로 쓰이길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헤드셋의 용두를 돌려 손쉽게 실세 세상을 가린 가상 모드로 전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애플은 발표 이후 지금까지 영화나 파노라마 사진을 감상하는 극히 제한적 쓰임새를 벗어난 다른 것을 보여준 적은 없다. 대부분의 데모는 정적인 상태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시연은 없었다. 더구나 주변을 숨길 수 있는 기능은 제공하지만, 그 상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길을 열어주려는 의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 이전에도 존재하긴 했으나, 비전 프로의 발표와 함께 떠오른 ‘공간 컴퓨팅’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개척하려는 강한 욕구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카메라와 센서로 캡처 한 외부 세계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완되어 브라우저 창, 앱 또는 공간 게임 개체가 거실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미 그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애플이 비전 프로를 내놓은 이후 메타나 피코, HTC, 밸브 같은 가상 현실 제조사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 역시 혼합 현실과 공간 컴퓨팅 이외에 가상 현실이나 메타버스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전 프로와 달리 메타 퀘스트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쪽에 초점을 뒀다.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애플은 어떤 이유로든 비전 프로를 가상 현실에 친숙하게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혼합 현실과 공간 컴퓨팅에 대한 확실한 뿌리를 내린 이후라도 애플은 다른 환경에 대해 의도적인 거부를 이어갈 것이다. 애플의 비즈니스 능력을 발휘하는 세상은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다.

덧붙임 #

메타와 애플의 XR 비즈니스의 차이는 곧 다른 글을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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