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불태운 엔딩, 하프라이프 : 알릭스(Half Life : Alyx)

22시간. <하프라이프 : 알릭스>(이하 알릭스)의 엔딩을 보고 난 뒤 스팀에 기록된 플레이 시간이다. 아마 더 이른 시간 안에 엔딩을 본 이들이 훨씬 많을 테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 이 게임을 즐길 여유가 없는 여건에서 엔딩을 보기 위해 이 시간이라도 끝을 봤다는 것에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는 중이다.

그만큼 시간을 쏟아 꼭 엔딩을 보고 싶었다. VR로 즐길 수 있는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니까. 그냥 PC에서 즐기는 하프라이프 신작이었으면 이렇게 엔딩을 보려 애쓸 이유도 없었을 테다. 물론 이 리뷰도 남기지 않았을 테고. 다만 VR로 즐기는 하프라이프를 기대했던 이들이 아니라 그냥 <하프라이프 3>를 원했던 이들에겐 공감을 얻기 힘들 수도 있겠다.

알릭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볼트라는 의문의 시설과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알릭스는 한글 자막이 표시된다.

어쨌거나 알릭스를 기대했던 것은 ‘VR로 즐기는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 한 문장에 다 들어 있기는 하다. 이는 이전 VR 게임을 즐기면서 생긴 모종의 응어리에 대한 보상 같은 기대도 감고 있다. 분명 공간의 특징을 잘 살린 뛰어난 VR 게임들은 너무나 많았으나 게임을 끝내더라도 그닥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데 따른 반작용이 강하게 남았다고나 할까?

그 원인에 대해 사실 깊이 고민한 적은 없다. 지금 돌아보면 그저 탄탄하지 못한 이야기 구성, 좁은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테이지식 진행, 몇 시간 동안 마음 먹고 즐기면 끝날 정도로 짧은 플레잉 시간, 쉬운 컨트롤을 위한 단조로운 게임 방식 같은 세세한 이유 정도만 떠오를 뿐이다.

이런 공간에 들어가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다 주변 소음도 기괴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런데 그 모든 요소를 하나로 뭉치면 결국 ‘세계관’이라는 한 단어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의 실험 사고와 함게 기괴한 생명체로 가득찬 세계로 바뀐 그곳에 대한 기억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가물가물하긴 했다. 하지만 하프라이프에 대한 약간의 잔상이 가스처럼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알릭스는 그 세계의 기억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만드는 작은 불쏘시개로 충분했다.

그렇게 되짚어 낸 기억의 일부와 연결해 보면 하프라이프 세계관의 알릭스를 끝까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된다. 알릭스는 이미 하프라이프의 타임라인 안에서 만난 캐릭터다. 하지만 알릭스 밴스가 왜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에 중요한 연결 고리인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한다면 인지하지 못했던 프랜차이즈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 이 사실은 게임의 시작이 아닌 게임의 끝에서 얻게 되는 이유다. (참고로 하프라이프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있으므로 이 글에서 스포가 될 만한 내용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다만 하프라이프 2의 이후의 알릭스 밴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알릭스 밴스가 하프라이프 2로 연결되기 이전의 이야기라는 점만 밝혀둔다.)

방독면을 쓰면 시야는 좁아지지만, 독가스를 뿜는 식물이 있는 곳을 안전하게 지날 수 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게이머들이 알릭스로 빙의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상 현실을 활용하기로 한 선택은 정말 옳았다. 많은 이들이 가상은 가상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릭스를 즐기는 동안 그것은 단순히 모니터로 보는 게임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치 게임 속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모든 감정을 느꼈으니 말이다. 사랑이나 애정 같은 끈적한 감정은 없어도 게임을 진행할 수록 두려움, 불안, 공포, 분노, 생존을 위한 본능, 위협에서 벗어난 안도감 등 모든 감정이 쉴새 없이 나를 자극한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정말 많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첫 시작에서 하늘에 떠 있는 볼트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가벼운 수준이다. 지하와 지상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다. 조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나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 길을 찾을 땐 온 신경이 불빛 끝에 집중된다. 귀를 계속 자극하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은 가까운 곳에 위협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하프라이프의 무기는 기본 3가지와 수류탄이 있고 주위의 빨간 가스통을 쏘면 주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 헤드크랩이나 강력한 무기를 갖고 무리 지어 전술적으로 움직인 콤바인 병사들을 제한된 자원으로 싸워야 한다. 키보드나 마우스 같은 컨트롤러는 쓸 수 없으므로, 양 손에 들고 있는 VR 컨트롤러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몸도 움직여야 한다. 전투 중엔 벽 뒤나 장애물에 허리를 숙이고 앉아 적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거나, 좁은 통로는 무릎을 꿇고 앉아야만 통과하려면 적극적으로 몸을 써야 한다.

두 손에 들고 있는 컨트롤러는 가상 현실 안에선 손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실제 현실에서 물건을 잡거나 옮기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가상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초반 진행 이후 중력 장갑을 낀 이후부터 온갖 사물을 끌어당겨 잡는 재미가 쏠쏠하긴 해도 어쨌거나 현실의 손처럼 물건을 잡고 던지거나 무기를 쥔다. 참고로 물건을 던지거나 파괴될 때 중력과 물리 효과가 적용된다.

무기를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후반부로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손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다 보니 무기 장전도 실제처럼 행동해야 한다. 빈 탄창을 뺄 때만 컨트롤러 버튼을 누를 뿐, 한 손으로 등에 맨 가방에서 새 탄창을 잡은 뒤 총에 넣은 다음 총신을 당겨 장전하는 것까지 직접 해야 한다. 그러니 적을 앞에 둔 상태에서 재장전은 매우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곳곳에서 상당히 빠르게 몰려오는 개미들과 싸워야 하는, 마치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장소에서 재장전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무기 전환이 지체되면 피해를 적지 않게 입는다. 제한된 무기 자원과 두 손의 현실적 움직임으로 인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게임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무기에 따라 탄창 확대, 자동 장전, 레이저 조준점, 수류탄 발사기 등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므로 전투는 상대적으로 편해진다. 문제는 무기를 업그레이드 하려면 곳곳에 숨겨진 레진을 모아야 한다는 것. 레진은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동식 화장실 변기 속이나 환기구 등 온갖 장소에 숨겨진 터라 레진을 찾는 데 시간을 많이 써 게임이 늘어지는 문제도 없지는 않다.

장치에 따라 여러 유형의 잠금 해제용 퍼즐을 풀어야 한다.

알릭스가 다른 VR 게임과 다른 점은 무조건 싸우기만 하는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릭스는 상당히 많은 퍼즐이 숨어 있고, 또한 피하는 게 능사인 것도 있다. 특히 업그레이드 장비를 작동시키거나 무기 상자를 열거나 전기를 연결해 문이나 엘리베이터를 가동하거나 곳곳의 지뢰를 해체하기 위한 여러 퍼즐은 어렵지는 않으나 그것을 푸는 재미가 남다르다. 또 하나의 재미는 제프와 관련한 것인데,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이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만 제프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게임이라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시사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VR 헤드셋을 쓰고 두 손을 써가며 오랫 동안 하프라이프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결국 끝을 봤다. 끝이 어땠는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이처럼 그 세계에 몰입해 끝을 본 게임이 얼마만인지 모를 일이다. 물론 나의 헤드셋(이전 오큘러스 리프트, 현재 퀘스트)에서 즐겼던 게임이나 소프트웨어가 많은 편이라 할 수는 없어도 이야기의 끝까지 진행하고픈 의지를 계속 살려낸 점이 너무 놀랍다.

키보드나 마우스 대신 컨트롤러를 잡은 진짜 손을 가상 현실에서도 손으로 써야 한다.

무엇보다 너무 게임에 몰입하다 보니 발 근처에 떨어진 헤드 크랩을 급한 마음에 진짜 발로 밟으려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게임 안에서 손 이외의 다른 컨트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행동이지만, 정말 헤드 크랩을 처치해야 내가 살 수 있는 시급한 상황에서 초반에는 이러한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다행인 점은 가상 현실 게임에 대해 어지럽거나 메스꺼움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프라이프 : 알릭스> 제작진이 그런 요소를 대부분 제거했기 때문이다. 알릭스를 즐긴 이들은 알겠지만, 탈 것을 거의 찾기 어렵다. 아마도 유일한 탈 것은 엘리베이터인데, 실제 엘리베이터가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움직일 때 순간적으로 어지럽다. 이는 가상 현실 속의 공간이 움직일 때 실제 현실 공간이 정지되어 있으면 나타나는 문제로 이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 반영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한다.

이것은 엔딩의 일부일 뿐, 진짜 엔딩은 따로 있다.

아무튼 알릭스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오큘러스 퀘스트(+오큘러스 링크)를 머리에 이고 살았다. 이른바 ‘확찐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30분 정도 비트 세이버를 하고 있었으나 알릭스는 헤드셋을 적게는 1시간, 길게는 3시간 동안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알 수 있던 한 가지 사실은 게임을 위해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기도 하고 팔을 사방으로 뻗으며 움직이다 보니 체력의 한계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하얗게 불태운 덕분에 말할 수 없는 엔딩을 봤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지 열흘이 넘은 지금, 아직도 현기증이 이어지고 있다. 밸브여, 얼른 후속작을!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야 사라질 것 같은 현기증이다.

덧붙임 #

스킨 오류로 이 곳에 공개된 모든 글의 작성 날자가 모두 동일하게 표시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10일에 공개되었습니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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