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시간. <하프라이프 : 알릭스>(이하 알릭스)의 엔딩을 보고 난 뒤 스팀에 기록된 플레이 시간이다. 아마 더 이른 시간 안에 엔딩을 본 이들이 훨씬 많을 테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 이 게임을 즐길 여유가 없는 여건에서 엔딩을 보기 위해 이 시간이라도 끝을 봤다는 것에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는 중이다.
그만큼 시간을 쏟아 꼭 엔딩을 보고 싶었다. VR로 즐길 수 있는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니까. 그냥 PC에서 즐기는 하프라이프 신작이었으면 이렇게 엔딩을 보려 애쓸 이유도 없었을 테다. 물론 이 리뷰도 남기지 않았을 테고. 다만 VR로 즐기는 하프라이프를 기대했던 이들이 아니라 그냥 <하프라이프 3>를 원했던 이들에겐 공감을 얻기 힘들 수도 있겠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04.jpg)
어쨌거나 알릭스를 기대했던 것은 ‘VR로 즐기는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 한 문장에 다 들어 있기는 하다. 이는 이전 VR 게임을 즐기면서 생긴 모종의 응어리에 대한 보상 같은 기대도 감고 있다. 분명 공간의 특징을 잘 살린 뛰어난 VR 게임들은 너무나 많았으나 게임을 끝내더라도 그닥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데 따른 반작용이 강하게 남았다고나 할까?
그 원인에 대해 사실 깊이 고민한 적은 없다. 지금 돌아보면 그저 탄탄하지 못한 이야기 구성, 좁은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테이지식 진행, 몇 시간 동안 마음 먹고 즐기면 끝날 정도로 짧은 플레잉 시간, 쉬운 컨트롤을 위한 단조로운 게임 방식 같은 세세한 이유 정도만 떠오를 뿐이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13.jpg)
그런데 그 모든 요소를 하나로 뭉치면 결국 ‘세계관’이라는 한 단어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의 실험 사고와 함게 기괴한 생명체로 가득찬 세계로 바뀐 그곳에 대한 기억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가물가물하긴 했다. 하지만 하프라이프에 대한 약간의 잔상이 가스처럼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알릭스는 그 세계의 기억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만드는 작은 불쏘시개로 충분했다.
그렇게 되짚어 낸 기억의 일부와 연결해 보면 하프라이프 세계관의 알릭스를 끝까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된다. 알릭스는 이미 하프라이프의 타임라인 안에서 만난 캐릭터다. 하지만 알릭스 밴스가 왜 하프라이프 프랜차이즈에 중요한 연결 고리인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한다면 인지하지 못했던 프랜차이즈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 이 사실은 게임의 시작이 아닌 게임의 끝에서 얻게 되는 이유다. (참고로 하프라이프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있으므로 이 글에서 스포가 될 만한 내용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다만 하프라이프 2의 이후의 알릭스 밴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알릭스 밴스가 하프라이프 2로 연결되기 이전의 이야기라는 점만 밝혀둔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12.jpg)
나를 비롯한 수많은 게이머들이 알릭스로 빙의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상 현실을 활용하기로 한 선택은 정말 옳았다. 많은 이들이 가상은 가상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릭스를 즐기는 동안 그것은 단순히 모니터로 보는 게임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치 게임 속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모든 감정을 느꼈으니 말이다. 사랑이나 애정 같은 끈적한 감정은 없어도 게임을 진행할 수록 두려움, 불안, 공포, 분노, 생존을 위한 본능, 위협에서 벗어난 안도감 등 모든 감정이 쉴새 없이 나를 자극한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정말 많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첫 시작에서 하늘에 떠 있는 볼트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가벼운 수준이다. 지하와 지상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다. 조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나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 길을 찾을 땐 온 신경이 불빛 끝에 집중된다. 귀를 계속 자극하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은 가까운 곳에 위협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05.jpg)
이러한 분위기에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 헤드크랩이나 강력한 무기를 갖고 무리 지어 전술적으로 움직인 콤바인 병사들을 제한된 자원으로 싸워야 한다. 키보드나 마우스 같은 컨트롤러는 쓸 수 없으므로, 양 손에 들고 있는 VR 컨트롤러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몸도 움직여야 한다. 전투 중엔 벽 뒤나 장애물에 허리를 숙이고 앉아 적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거나, 좁은 통로는 무릎을 꿇고 앉아야만 통과하려면 적극적으로 몸을 써야 한다.
두 손에 들고 있는 컨트롤러는 가상 현실 안에선 손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실제 현실에서 물건을 잡거나 옮기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가상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초반 진행 이후 중력 장갑을 낀 이후부터 온갖 사물을 끌어당겨 잡는 재미가 쏠쏠하긴 해도 어쨌거나 현실의 손처럼 물건을 잡고 던지거나 무기를 쥔다. 참고로 물건을 던지거나 파괴될 때 중력과 물리 효과가 적용된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09.jpg)
손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다 보니 무기 장전도 실제처럼 행동해야 한다. 빈 탄창을 뺄 때만 컨트롤러 버튼을 누를 뿐, 한 손으로 등에 맨 가방에서 새 탄창을 잡은 뒤 총에 넣은 다음 총신을 당겨 장전하는 것까지 직접 해야 한다. 그러니 적을 앞에 둔 상태에서 재장전은 매우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곳곳에서 상당히 빠르게 몰려오는 개미들과 싸워야 하는, 마치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장소에서 재장전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무기 전환이 지체되면 피해를 적지 않게 입는다. 제한된 무기 자원과 두 손의 현실적 움직임으로 인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게임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무기에 따라 탄창 확대, 자동 장전, 레이저 조준점, 수류탄 발사기 등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므로 전투는 상대적으로 편해진다. 문제는 무기를 업그레이드 하려면 곳곳에 숨겨진 레진을 모아야 한다는 것. 레진은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동식 화장실 변기 속이나 환기구 등 온갖 장소에 숨겨진 터라 레진을 찾는 데 시간을 많이 써 게임이 늘어지는 문제도 없지는 않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02.jpg)
알릭스가 다른 VR 게임과 다른 점은 무조건 싸우기만 하는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릭스는 상당히 많은 퍼즐이 숨어 있고, 또한 피하는 게 능사인 것도 있다. 특히 업그레이드 장비를 작동시키거나 무기 상자를 열거나 전기를 연결해 문이나 엘리베이터를 가동하거나 곳곳의 지뢰를 해체하기 위한 여러 퍼즐은 어렵지는 않으나 그것을 푸는 재미가 남다르다. 또 하나의 재미는 제프와 관련한 것인데,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이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만 제프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게임이라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시사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VR 헤드셋을 쓰고 두 손을 써가며 오랫 동안 하프라이프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결국 끝을 봤다. 끝이 어땠는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이처럼 그 세계에 몰입해 끝을 본 게임이 얼마만인지 모를 일이다. 물론 나의 헤드셋(이전 오큘러스 리프트, 현재 퀘스트)에서 즐겼던 게임이나 소프트웨어가 많은 편이라 할 수는 없어도 이야기의 끝까지 진행하고픈 의지를 계속 살려낸 점이 너무 놀랍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10.jpg)
무엇보다 너무 게임에 몰입하다 보니 발 근처에 떨어진 헤드 크랩을 급한 마음에 진짜 발로 밟으려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게임 안에서 손 이외의 다른 컨트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행동이지만, 정말 헤드 크랩을 처치해야 내가 살 수 있는 시급한 상황에서 초반에는 이러한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다행인 점은 가상 현실 게임에 대해 어지럽거나 메스꺼움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프라이프 : 알릭스> 제작진이 그런 요소를 대부분 제거했기 때문이다. 알릭스를 즐긴 이들은 알겠지만, 탈 것을 거의 찾기 어렵다. 아마도 유일한 탈 것은 엘리베이터인데, 실제 엘리베이터가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움직일 때 순간적으로 어지럽다. 이는 가상 현실 속의 공간이 움직일 때 실제 현실 공간이 정지되어 있으면 나타나는 문제로 이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 반영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한다.
![](https://chitsol.com/wp-content/uploads/2020/04/half_life_alyx_screen_ending.jpg)
아무튼 알릭스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오큘러스 퀘스트(+오큘러스 링크)를 머리에 이고 살았다. 이른바 ‘확찐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30분 정도 비트 세이버를 하고 있었으나 알릭스는 헤드셋을 적게는 1시간, 길게는 3시간 동안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알 수 있던 한 가지 사실은 게임을 위해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기도 하고 팔을 사방으로 뻗으며 움직이다 보니 체력의 한계가 확실히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하얗게 불태운 덕분에 말할 수 없는 엔딩을 봤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지 열흘이 넘은 지금, 아직도 현기증이 이어지고 있다. 밸브여, 얼른 후속작을!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야 사라질 것 같은 현기증이다.
덧붙임 #
스킨 오류로 이 곳에 공개된 모든 글의 작성 날자가 모두 동일하게 표시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10일에 공개되었습니다.
Be First to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