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비전 프로 같은 제품은 왜 등장하는가?

한국 시간으로 6월 6일 새벽에 진행된 WWDC23에서 애플 비전 프로라는 불쏘시개가 발표되자, 정말 오랜 만에 수많은 분석과 견해라는 다양한 땔감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같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게 됐다. 비전 프로 같은 제품이 그 이전에도 없던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시끄러운 반응을 끌어내는 것을 보면, 역시 화두를 던지는 것이 진짜 애플의 능력이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기회가 아닌 듯싶다.

이 블로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알겠지만, 그래도 제법 오랫 동안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 혼합 현실과 관련된 기술과 제품을 다뤄 온 터라 비전 프로가 가진 몇 가지 함의와 관련해 나 역시 페이스북 타임 라인에 의견을 공유했더랬다. 아직 비전 프로를 직접 본 게 아니므로 평가를 줄이는 대신, 애플과 팀쿡이 기존 생태계에 얽히지 않으려 애쓴 흔적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페북에 글을 올린 이후 지난 목요일(6월 8일) 이른 아침 김어준 뉴스 공장에서 한빛 미디어 박태웅 의장님과 비전 프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오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 또한 중요한 이야기를 거의 못해 아쉬운 시간이기도 했다. ‘가상이나 증강, 혼합 현실 같은 컴퓨팅이 왜 오는가?’를 지금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왜 비전 프로 같은 헤드셋을 만드는가’를 이해할 수 없어서다. 때문에 뉴공 출연 전날 써서 보낸 대본 초안을 일부 내용을 보완해 이곳에 공유한다. 이는 비전 프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나왔던 제품들이 존재했던 이유, 앞으로 나올 제품이 존재할 이유기도 하다.

애플 비전 프로는 무엇인가?

먼저 ‘개인 컴퓨팅(PC), 모바일 컴퓨팅 이후에 어떤 컴퓨팅이 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할 듯하다. 모바일 시대는 클라우드 및 데이터 센터와 결합해 우리 세계의 디지털화(Digitalization)를 가속해 왔다. 모바일로 수집한 수많은 데이터, 사람, 사물, 심지어 세상 전체를 디지털화 한 것이다. 무엇보다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많이 쌓이다 보니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기계 학습 성능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향상됐다. 그렇게 기계 학습으로 향상된 여러 추론 능력은 기계가 사물을 알아채는 컴퓨터 비전 성능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특정 사물이나 공간에 대해 기계가 더 잘 알아채는 시대로 발전해 왔다.

그렇게 디지털화된 세상의 모든 데이터는 다시 세상을 구축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사물을 넘어 수많은 공간 및 세상 전체가 디지털 세상으로 만들어지거나, 디지털 세상의 객체가 실제 공간에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터에 기반한 디지털 세상도 우리가 세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감각을 건드리는 변환이 필요하다. 입체적 공간인 디지털 세상을 평면 디스플레이에서 보면 우리 감각은 그것을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우리 감각이 반응하는 새로운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가상이든, 증강이든, 혼합이든 용어만 다르지, 늘어나는 디지털 객체와 확장되는 디지털 세계라는 흐름에도 헤드셋 형태의 컴퓨팅 장치는 필연적인 것이다.

애플이 만든 비전 프로는 바로 그 공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재구축하는 새로운 유형의 컴퓨터 중 하나다. 공간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프로세서와 디스플레이, 광학, 카메라 및 센서 등을 통합해 설계한 하드웨어와 이 장치의 작동에 필요한 처리 체계를 갖춘 비전OS, 공간 및 사물, 신체를 인식하는 컴퓨터 비전, 이를 다루기 위한 눈과 손 추적 UI, 그리고 그 환경에 맞춰 실행할 수 있는 앱 및 콘텐츠를 이번에 공개한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나?

비전 프로 같은 혼합 현실 헤드셋의 가장 큰 장점은 물리 공간을 직접 보는 게 아니라 디스플레이를 통해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리 공간은 한계를 가져도 디스플레이는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눈에는 카메라로 수신되는 실제 공간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도, 물리 공간의 깊이, 사물, 색상 등을 데이터로 변환한 보이지 않는 정보가 있고, 디스플레이는 실제 공간 데이터와 그 공간에 표시할 데이터를 결합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공간 전체를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모니터를 예로 들면 사실 책상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모니터 수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데 책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공간 전체를 활용하면 모니터 역할을 하는 가상의 패널을 여러 개 띄울 수도 있다. 마치 초대형 벽면에 수십 개 모니터를 갖춘 보안 관제실처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아니면 텅 빈 공간 전체를 차지하도록 대형화된 화면을 넣기도 한다. 비전 프로 같은 XR 장치의 디스플레이는 컴퓨팅 성능만 받쳐주면 무한정 쓸 수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데스크톱에서 여러 앱을 띄우고 작업할 때 이젠 창 전환 같은 개념이 아니라 전체 화면으로 실행 중인 앱 패널이나 캔버스 전환 같은 개념으로 바뀔 수 있다.

또 다른 점은 3D 모델을 진짜처럼 보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3D로 작업한 모델을 대부분의 평면 모니터에서 보면 입체감을 느끼긴 어렵다. 평면 모니터가 3D를 표현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적으로 필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전 프로 같은 헤드셋은 3D 모델을 입체감 있게 볼 수 있으니까 더 정교한 모델 작업과 검토를 할 수 있다. 가상인 3D 모델을 손으로 만지고 다루면서 창의적이거나 생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 참고로 비전 프로에 한정된 건 아니지만, 이러한 특성을 살려서 게임 엔진인 유니티가 내놓은 에디터XR은 개발자가 직접 게임 엔진 안에서 1인칭 시점으로 돌아다니면서 각종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학습이 자연적으로 오랜 시간 이뤄지면 디지털 객체나 세상에 대해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전 프로 같은 제품이 꼭 실제 공간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공간을 완전히 다르게 바꿀 수도 있다. 비전 프로 발표에선 아주 강조된 부분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영화관 앱을 실행해 다양한 유형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세계의 유명한 곳, 또는 오지를 헤드셋을 쓴 그 자리에서 여행할 수도 있다. 앞서 디스플레이를 활용하기 때문에 화장실처럼 아주 좁은 공간에서 쓸 땐 아예 공간을 가상화해 끝도 없는 가상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공간을 활용한 게임도 있는데, 비전 프로는 그 부분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생태계적 의미는 무엇인가?

비전 프로를 받아들이는 반응이 상당히 다르다. 일단 현재 시점에서 애플 비전 프로는 애플 생태계를 넓히기 위한 컴퓨팅 장치라고 봐야 할 듯싶다. 왜냐하면 비전 프로가 애플 제품 이용자들에게 여러 이점을 주도록 설계된 때문이다

비전 프로가 이제 막 시작하기 때문에 자체적인 공간 앱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아이패드나 아이폰에서 실행되는 기존 앱을 공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말은 기존 아이패드 이용자나 아이폰 이용자가 비전 프로를 쓰는 데 더 유리하다는 뜻이다.

더불어 아이폰이나 에어팟, 맥 같은 애플 장치와 연동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아이폰으로 수신되는 전화나 문자 확인은 당연하고, 공간 스피커를 내장했지만 무선으로 지연 없이 소리를 들으려면 에어팟과 연동이 필수다. 그리고 맥이 있다면 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저절로 무선으로 연동해 원격 데스크톱을 실행하도록 했다. 모든 게 애플 제품 생태계와 연동하도록 해 놓은 터라 애플 제품 생태계에서 벗어난 이용자들은 사실 쓰기가 쉽진 않아 보인다.

특히 비전 프로를 쓴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페이스 타임을 할 수 있다. 이때 헤드셋을 쓴 내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애플은 별도의 아바타 시스템 대신 디지털 페르소나를 활용한다. 디지털 페르소나는 이용자의 얼굴을 재구성한 디지털 모델로 이용자의 입모양이나 표정을 페이스타임으로 연결된 다른 이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준다다. 그런데 디지털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아이폰을 활용해 헤드셋을 쓰기 전 얼굴을 스캔해야 한다. 즉, 아이폰이 없으면 이 기능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애플 생태계를 최대한 활용하게끔 작업한 예다.

그렇다고 애플이 다른 공간 앱 생태계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많이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번 발표에서 눈에 띈 건 공간 기반 게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애플은 100개의 2D 게임을 즐길 수 있다고 했지만, 비전 프로라는 공간형 컴퓨팅 장치 이용자들에게 충분한 가치를 준다고 보긴 힘들다. 그런데 다른 플랫폼에 있는 공간형 게임을 가져오려는 준비와 노력을 할지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보통 메타 퀘스트나 플레이스테이션VR2, PCVR 등 공간형 게임들은 모두 표준적인 컨트롤러를 쓴다. 2019년에 정식 배포된 오픈XR 표준을 따라 버튼 방식을 모두 통일했으나 비전 프로는 컨트롤러가 없다. 버튼을 통일한 6자유도 컨트롤러가 없으니 기존 컨트롤러 기반 공간형 게임 콘텐츠의 포팅에 한계가 있을 듯하다.

경쟁은 어떻게 될까?

이번 발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면 애플은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절대로 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플 CEO 팀쿡은 이전부터 메타버스라는 용어에 편입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발언을 여러 번 했고, 비전 프로의 발표를 봐도 메타버스와 거리를 두려 무척 애썼다. 비전 프로는 가상 세계보다 물리적 현실에서 컴퓨팅 환경의 개선에 초점을 둔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대표적인 장면이 가상 세계와 상호 작용을 위한 장치가 거의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손으로 가상의 개체들을 제어할 수는 있는데, 가상의 개체가 내게 보내는 신호를 받을 그 어떤 장치가 없는 것이다. 손으로 사물을 만지는 데 손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가상 세계도 세상이기 때문에 이용자에게 뭔가 신호를 주는 장치가 필요한 데 비전 프로에는 그런 게 거의 없다. 나는 애플이 이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본다. 애플의 비즈니스에선 가상보다 실제 물리 현실이 더 중요해서다.

때문에 메타버스를 지향하는 경쟁자들, 대표적으로 메타 같은 기업을 당장 경쟁 대상으로 보긴 힘들다. 메타는 실제 세계는 물론 가상 세계를 아우르는 기술과 서비스를 동시에 개발하고 있고, 애플은 가상 환경을 옵션으로 뒀기 때문에 가상 세계에 필요한 아바타나 가상 세계 서비스 구축에 대해선 적어도 이번 발표에선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미온적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두 기업이 접점을 찾는 순간이 오겠지만, 당장은 시장을 빼앗으려는 싸움보다 양 진영이 서로의 사업 영역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어쨌든 애플이 비전 프로를 3천500달러라는 비싼 가격에 내놓은 것이 다른 생태계에 좋은 일이 됐다는 것이다. 솔직히 독립형이나 PC VR 생태계를 이끄는 메타나 바이브, 스팀 같은 회사들이 3천500달러에 이런 제품을 내놨으면 비판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메타가 하드웨어 제원을 현실적으로 타협한 퀘스트 프로를 지난 해 10월 1천500달러에 내놨는데, 너무 비싸다는 비판을 받은 끝에 결국 가격을 1천 달러로 내렸다. 하지만 애플이 고사양 혼합 현실 헤드셋을 3천500달러에 내놓았기 때문에 이제 다른 기업들도 제원을 타협하는 일 없이 비전 프로에 준하는 하드웨어를 내놓고 경쟁하는 데 부담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TV 같은 디스플레이 가전 생태계 쪽이 점차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비전 프로를 발표하면서 디즈니 플러스나 스포츠 중계 콘텐츠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애플 뿐만 아니라 메타나 헤드셋 플랫폼 기업들의 콘텐츠 제휴가 늘어나 TV는 물론 극장 및 경기장 환경에서 콘텐츠를 보는 경험이 쌓이면 그 여파가 미칠 곳은 오히려 영상 가전 업체들이 될 가능성도 있다. 더불어 비전 프로가 스테레오스코픽 동영상 촬영을 지원하면 3D 영상을 넘어 볼류메트릭 영상 분야의 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애플과 메타 같은 기업들의 도전과 이용자가 늘어날 수록 OTT를 위한 하드웨어 시장와 볼류메트릭 비디오 시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PHIL CHiTSOL CHOI Written by:

One Comment

  1. Jamie
    2023년 6월 10일
    Reply

    생각치 못했던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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